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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창작단 [film production unit]

상세 정보 표
분야 장르별체계관리 > 영상 > 영화
9분류 조직
집필자 오양열
시기1967년(백두산창작단)
정의
일반적으로는 영화문학(시나리오)이 나온 후 영화 제작을 위해 조직되는 영화제작단을 의미하나, 특정적으로는 1980년대 영화문학 영화창작에서 영화제작까지 책임지는 촬영소 소속 고정창작단(상설창작단)을 의미한다.
규모와 구성
백두산창작단 외에 각각의 고정창작단이 언제 조직되었는지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으나, 1980년대에 조선예술영화촬영소에 백두산창작단, 왕재산창작단, 보천보창작단, 대흥단창작단, 삼지연창작단이 있었고, 조선2.8영화촬영소(현 조선4.25영화촬영소)에 대덕산창작단, 월미도창작단, 월비산창작단이 있었다. 또 신필림 내에도 신필림영화창작단이 있었다. 평양연극영화대학 내의 청소년영화창작단은 현재도 존속하고 있다.
내용
창작단은 영화촬영소의 ‘기본 전투단위’로, 촬영소에 부과된 영화제작 임무를 직접 맡아 수행하는 특수한 형태의 창작 및 생산 단위이다. 예술창조단위로서 어느 한 영화의 창작에 대하여 전반적으로 책임을 지며, 영화제작 전 공정의 작업을 맡아 수행한다. 고정창작단의 창설 목적은 독립채산제와 자유경쟁식 운영, 대강의 창작 장르와 주제 할당을 통한 영화제작의 효율화와 전문화에 대한 실험적 시도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67년 최초의 고정창작단인 백두산창작단이 출범했고, 1982~1985년 사이에 10여 개 고정창작단을 창설한 것으로 추정된다. 영화문학의 창작∙채택에서 영화의 완성까지 책임지는 고정창작단을 통해 창작단별 독립채산제와 창작단 간 자유경쟁식으로 운영한다. 1984~1990년이 창작단의 전성기이며, 김정일 지시로 1993년 백두산창작단 해체와 함께 나머지 고정창작단들도 해체하였다. 북한은 <민족과 운명>제작에 앞서 ‘주체적인 창작체계’를 환원 복구한다고 밝히고, 1993년 이들 고정창작단들의 ‘자기본위’의 사업방식을 비판하면서 해체하였다.
1980년대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소속 상설 영화창작단의 활동인물과 제작영화는 다음과 같다.
백두산창작단은 항일혁명주제, 수령형상 영화전문 창작단으로, 작품에 따라 보천보, 대흥단, 대덕산창작단 등 타 창작단과 공동 작업하는 경우도 많았다. <푸른 소나무(전·후편)>(1984, 백두산창작단과 공동 제작), <해발>(1985), <려명>, <민족의 태양>(1987~1991) 등이 보천보창작단과의 협업의 결과이다.
보천보창작단은 구 소련의 모스필름과 합작으로, <영원한 전우(1~2부)>(1985)를 내놓았고, 영화문학작가 설주용, 김국성, 소명숙, 연출가 김성교, 리재준 등이 활약했다. <푸른 소나무(전·후편)>(1984), 백두산창작단과 공동 제작), <언제나 한 마음>(1985), <진심>(1986), <온달전>(1986), <조선의 별(10부)>(1987), <려명(전·후편)>(1987), <민족의 태양(1~2부)>(1987~1988), <내 나라>(1988, 이상 백두산창작단과 공동 제작), <한 건축가에 대한 이야기>(1987), <사랑의 물소리>(1990), <나의 어머니>(1990) 등이 있다.
왕재산창작단은 영화문학작가 김세륜, 리춘구, 김무국, 연출가 박정주, 장영복, 렴성국 등이 활동했고, <운행길에서 만난 처녀>(1983), <한 지대장의 이야기(1~2부)>(1983), <꿈 많은 처녀>(1984), <봄날의 눈석이(1~2부)>(1985, 조총련영화제작소 합작, 해외로케 작품), <은비녀>(1985, 조총련 합작), <위대한 품(1~2부)>(1986), <참된 심정>(1986), <녀교원>(1986), <소년빨찌산>(1986), <참된 심정>(1986), <녀교원>(1986), <우리 대의원>(1987), <군당지도원>(1987), <림꺽정(1~5부)>(1987~89), <요람(1~2부)>(1988), <자신에게 물어보라>(1988), <한생을 바쳐>(1988), <교육자의 모습>(1988), <어제도 오늘도>(1989), <철산봉의 아들>(1990), <공청원들>(1990), <높은 산정에서>(1990) 등이 있다.
대흥단창작단은 영화문학작가 리세일, 채경원, 박창수, 리희찬, 연출가 윤동국, 김영호, 정무인 등이 활동했고, <평범한 사람>(1985), <조선의 별(9부)>(1985, 백두산창작단과 공동 제작), <어머니의 마음>(1986), <우리 인민반장>(1986), <가야금에 깃든 사연>(1986), <보금자리>(1986), <보증(1~2부)>(1987), <북산땅의 주인>(1987), <시형과 제수>(1987), <나의 행복>(1988), <처녀운전수>(1988), <서두른 결혼>(1988), <기쁜 날>(1988), <끝나지 않은 항로>(1988), <쉰 두개의 별>(1989), <잊을 수 없는 추억>(1989), <편지>(1989), <먼 길을 가는 사람들>(1990), <하얀 꽃>(1990) 등이 있다.
삼지연창작단은 영화문학작가 최정찬, 김흥국, 변우순, 연출가 림창범, 고학림, 박상복, 정건조 등이 활동했고, <설한령의 세 처녀>(1984), 경희극 <금강산으로 가자>(1986), <하루를 앞두고>(1986), <어머니의 소원>(1987), <다시 시작된 우리집 문제>(1987), <땅과 말하는 처녀>(1988), <봄부터 여름까지>(1988), <마음에 드는 청년>(1988), <내가 본 나라>(1988), <시인 조기천>(1988), <우리 삼촌집 문제>(1988), <심장에 남는 사람>(1989), <정다운 불빛>(1989), <아무도 몰라>(1990), <세 번째 금메달>(1990), <억센 나무>(1990) 등이 있다.
1980년대 조선2.8예술영화촬영소(현 조선4.25영화촬영소) 소속 상설 영화창작단의 활동인물과 제작영화는 다음과 같다. 동 촬영소는 군사물이나 통일관련 주제를 주로 다루는 촬영소이나 대덕산창작단은 군사물에만 국한하지 않았고, 월미도창작단은 군인, 군사 관련 주제, 월비산창작단은 정탐물 혹은 액션 스릴러 영화를 주로 제작했다.
대덕산창작단은 영화문학작가 오현락, 조순철, 박국태, 연출가 최부길, 조경순 등이 활동했고, <혁명가(1~2부)>1985), <전쟁이 끝날 무렵>(1985), <군기>(1986), <새 정권의 탄생(1~2부)>(1986), <잊을 수 없는 나날에>(1986, 백두산창작단 공동), <도라지꽃>(1987), <파도는 노래한다>(1987), <진실한 사람>(1987), <군 안전부장>(1987), <별무리>(1988), <복무자들>(1988), <대덕산>(1988), <생의 흔적>(1989), <곡절 많은 운명(1~2부)>(1989~1990), <우리는 청춘(전·후편)>(1990), <중대장>(1990) 등이 있다.
월미도창작단은 촬영가 강리조, 박세웅이 활동했고, <월미도>(1982), <려단장의 옛 상관>(1984), <첫 보안서원들(전·후편)>(1984), <녀성안전원>(1985), <로동자부대>(1985), <네거리 초병>(1986), <추억의 노래>(1986), <아들들>(1986), <빛나는 금별>(1986), <혁명전사(전․후편)>(1987), <먼 남쪽 바다에서>(1987), <전사의 숨결>(1987), <군안전부장>(1987), <하늘의 6부자>(1988), <병사의 고향>(1988), <한 마음으로>(1988), <영생(전·후편)>(1988, 백두산창작단과 공동 제작), <전사들>(1989), <내가 설 자리>(1989), <한 순간을 위하여>(1989), <나의 고지>(1991) 등이 있다.
월비산창작단은 <붉은 화살>(1984), <제 9련대>(1985), <고향으로 온 련대장>(1986), <미더운 전우>(1986), <명령 027호>(1986), <평화는 깃들지 않았다>(1987), <삶의 권리>(1988), <의용군 녀병사들>(1988), <안해들의 마음>(1988), <몇 사람만 알고 있다>(1988), <어느 한 해안도시에서>(1988), <밀림 속의 메아리>(1989), <붉은 단풍잎>(1989), <인생의 봄>(1990), <세월이 흘러도>(1990), <고향땅>(1990)과 같이 간첩영화나 수사탐정물을 주로 제작했다.
1993년 영화창작단 해체의 근거는 김정일이 1992년 5월 23일 제2의 문학예술혁명을 주창한 담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담화에서 김정일은 창작단을 통한 영화 제작으로 인해 집체 창작과 속도전 등 주체적인 창작지도체계와 창조체계가 와해되었고, 책임일꾼(간부)들의 영화 창작사업에 대한 통일적인 지도가 어려워졌으며, 영화의 사상예술성보다는 제작 편수 등 양적 실적을 올리는 데만 신경을 썼고, 창작 역량과 물질기술적 수단을 집중적∙기동적으로 동원하기가 어려워졌으며 분산성과 본위주의로 인해 혁명적 창작기풍과 생활기풍을 세우는데 저해하였다고 지적하였다.
창작단별 독립채산제를 통해 자유경쟁식으로 운영했던 고정창작단(상설창작단)이 1993년에 해체되면서, 북한의 영화제작체계는 ‘우리 식 창조체계’(‘주체의 창조체계’)로 환원되었다. 즉 김정일의『영화예술론』(1973)이 제안한 집단적인 공동창조와 속도전식 제작방식으로 되돌아 간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다부작 영화 <민족과 운명>이다. <민족과 운명>을 통해 ‘집단주의적 창작기풍과 속도전의 원칙을 구현함으로써 한해도 못되는 사이에 영화를 7부까지 세계적인 걸작으로 만들어 내놓았고 15부까지의 영화문학과 연출대본을 완성하였으며 50부까지의 영화줄거리를 다 세워놓는 기적을 창조’(‘다부작 예술영화 《민족과 운명》의 창작성과에 토대하여 문학예술건설에서 새로운 전환을 일으키자’)했다고 치켜세우고 있다.
관련어 보천보창작단 , 왕재산창작단, 대흥단창작단, 삼지연창작단, 대덕산창작단, 월미도창작단, 월비산창작단, 신필림영화창작단, 청소년창작단
동의어 창작단
관련연구(남) 한국문화관광연구원 편, 『북한 예술단체 총람』, 서울: 한국문화관광연구원, 2011.
이명자, 『북한영화사』, 서울: 커뮤니케이션북스, 2007.
참고자료 한국문화관광연구원 편, 『북한 예술단체 총람』, 서울: 한국문화관광연구원, 2011.
이명자, 『북한영화사』, 서울: 커뮤니케이션북스, 2007.
조선중앙통신사 편, 『조선중앙년감』, 평양: 조선중앙통신사,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