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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막 [An Mak]

상세 정보 표
분야 인물별체계관리 > 문학 > 시인
9분류 인물
집필자 남원진
출생일1910년 4월 18일
사망일미상
출생지경기도 안성
정의
안막은 북한에서 시인이자 비평가, 공연 기획자, 매니저로 활동했다.
용례/관용구
안막의 ≪꽃≫, ≪이삭≫, ≪시≫ 등을 비롯한 그의 시작품들은 현실에 대한 아무러한 정열과 감흥을 찾아 볼 수 없고 부르죠아 객관주의 입장에서 씌어진 유해한 작품인 것이다. 박세영, 「시 문학의 전투적 기치를 높이자」, 『문학신문』, 1959년 2월 1일.
내용
안막은 1910년 4월 18일 경기도 안성, 꽃뫼마을에서 천안사립영진학교의 창립자인 안기선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신동 소리를 들었으며, 제2고등보통학교(현재 경복고등학교) 때 학생운동으로 퇴학당한 경험이 있으며, 도시샤(同志社)대학을 거쳐 와세다(早稻田)제일고등학교에서 러시아문학과에 입학하면서 사회주의 이론을 본격적으로 접하였다. 이북만, 김두용, 임화, 김남천 등과 함께 안막은 공산당 재건운동의 준비기관인 무산자사(無産者社)를 설립한 일명 ‘제3전선파’로 활동했으며, 1920년대 말 귀국하여 김남천, 임화, 권환 등과 함께 카프(KAPF)의 제2차 방향 전환을 주도했으며, 1931년 9월 카프 제1차 검거 선풍 당시 체포되어 1932년 1월 불기소처분으로 석방되었다. 1935년 3월 와세다대학 졸업 후 안막은 문인으로서의 활동은 거의 접고, 최승희의 무용 공연 기획자 겸 매니저로 활동하는 데 전념했다. 1945년 초 안막은 북경에서 최승희의 일을 도와 동방무용연구소를 관리하고 운영하던 중, 조선독립동맹 본부가 있던 연안으로 떠날 결심을 하고 북경을 탈출했는데, 연안에서 조선독립동맹의 간부들이었던 김두봉, 무정, 최창익, 김창만, 허정숙 등과 친분을 쌓았고, 1945년 9월 가족을 북경에 둔 채 연안에 있던 조선독립동맹 동지들과 함께 평양으로 떠났다. 안막은 1946년 3월 조선로동당 선전선동부 부부장, 북조선예술총련맹 상임위원회 부위원이 되며, 1949년 11월 평양음악학원 초대 학장을 역임하며, 1956년 2월 문화선전성 부상에 취임하며, 1956년 10월 조선작가동맹 상무위원이 되었다. 그러나 1958년 시문학 분과 창작 총화회의에서 서만일, 박석정 등과 함께 안막은 부르주아 사상에 젖은 우연분자들로 지적되었는데, 무사상적인 작품을 발표하고 그런 작품을 옹호하였다고 비판받았다. 1958년 안막은 종파분자라는 혐의로 비판받고 문단에서 사라졌다.
식민지 시대 안막은 임화, 김남천 등과 함께 카프의 제2차 방향 전환을 주도했고, 사회주의 리얼리즘론을 둘러싼 논쟁의 계기를 마련하는 등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30년 3월 발표한 첫 평론 「프로예술의 형식문제」(『조선지광』, 1930. 3)에서 8월 「조선프로예술가의 당면의 긴급한 임무」(『중외일보』, 1930년 8월 16일~22일)까지의 글에서 안막은 프롤레타리아 리얼리즘론을 바탕으로 하여 예술운동의 볼세비키화를 역설했다. 안막이 주장한 볼세비키화론은 당파성의 확립과 그를 통한 대중성의 확보라는 당대 문예운동 볼세비키화의 핵심을 담고 있었다. 안막에 의해 주창되고 권환에 의해 구체화된 프롤레타리아 리얼리즘은 당의 정치적 임무에 지나치게 도식적, 기계적으로 결합시키고 있었던 점과 1931년 카프 제1차 검거 선풍으로 인해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사회주의 리얼리즘 논의로 전환되었다. 1933년 안막은 「창작방법문제의 재토의를 위하여」(『동아일보』, 1933년 11월 29일~12월 7일)에서 1930년에 주창했던 프롤레타리아 리얼리즘론을 비판하고 새로운 창작방법론으로 사회주의 리얼리즘 창작방법론 도입을 주창했다. 백철이 사회주의 리얼리즘론이란 용어를 처음 소개했지만,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조선적 적용’론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안막의 이 평문 이후 김남천, 안함광, 권환, 한효, 김두용 등에 의해 이루어졌다.

1945년 8월 15일 중국 북경에서 해방을 맞은 안막은 9월 초 평양으로 들어가 북한 문예운동의 핵심에서 활동했는데, 1946년 3월 25일 북조선예술총련맹 상임위원회 부위원으로, 1946년 10월 13~14일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의 부위원장으로, 1951년 3월 10일 조선문학예술총동맹 검사위원 위원장으로, 1953년 9월 26~27일 제1차 전국작가예술가대회에서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1956년 10월 14~16일 제2차 조선작가대회에서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위원, 조선작가동맹 중앙상무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북한에서 활동하던 기간 안막은 ‘민족문학’이나 ‘고상한 사실주의’ 등의 사회주의 문학 건설을 위한 문예 활동을 펼쳤다. 현재까지 남한의 연구에서는 안막이 북한에서 ‘14편의 시와 4편의 평론’만을 남겼다고 서술하고 있지만, 위에서 보듯 실제로 북한에서 활동하던 기간 동안 안막은 그보다 더 많은 「만리장성」 등의 시와 「조선문학과 예술의 기본임무」 등의 여러 평론을 남겼다.
관련어 조선작가대회
동의어 安漠, 안필승, 安弼承, 추백, 萩白, 秋白
관련연구(남) 이주미, 「‘추백’의 프로문학 비판과 안막의 예술 전략」, 『국제어문』, 41권, 2007.
전승주, 「안막―문예 운동가, 무용 기획자, 문예 정책가로서의 삶」, 『안막선집』,서울:현대문학, 2010.
조미숙, 「불우한 ‘신동’, 강점기 젊은 예술혼의 방황 - 비평가, 시인, 매니저로서의 안막의 생애」, 『한국문예비평연구』, 32권, 2010.
조미숙, 「1930년대 안막의 비평 연구 - 마르크시즘의 확인과 불세비키화의 작업」, 『(순천향)인문과학논총』, 27권, 2010.
라기주, 「해방과 분단의 공간에 나타난 예술가들의 이념적 행보 - 안막의 문학과 삶을 중심으로」, 『한국문예비평연구』, 34권, 2011.
관련자료(북) 박세영,「시 문학의 전투적 기치를 높이자」,『문학신문』, 1959년 2월 1일.
참고자료 박세영,「시 문학의 전투적 기치를 높이자」,『문학신문』, 1959년 2월 1일.
전승주, 「안막―문예 운동가, 무용 기획자, 문예 정책가로서의 삶」, 『안막선집』,서울:현대문학, 2010.
조미숙, 「불우한 ‘신동’, 강점기 젊은 예술혼의 방황 - 비평가, 시인, 매니저로서의 안막의 생애」, 『한국문예비평연구』, 32권,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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