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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룡만 [An Ryongman]

상세 정보 표
분야 인물별체계관리 > 문학 > 시인
9분류 인물
집필자 박태상
출생일1916년 1월 18일
사망일1975년 12월 29일
출생지평안북도 신의주시
정의
안룡만은 30년대 초 일본에서 활동하다 귀국한 후 1948년 경에 월북하여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대표적 작품으로 <축제의 날도 가까워>, <나의 따발총> 등이다.
용례/관용구
조국해방전쟁 시기에는 전선에 종군하면서 창작활동을 벌렸으며 전후에는 작가동맹 평안북도 지부장, 현역작가 등으로 있으면서 전변하는 조국의 현실을 반영한 수많은 시를 창작하였다. 『조선대백과사전 26』, 2001.
내용
안룡만은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삼무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그 이듬해 광주학생사건의 여파로 일어난 동맹휴학에 관련되어 출학당하였다. 그 후 노동을 하는 한편 적색로동조합, 국경프로레타리아 아동문학연구회 등에 관계하면서 리원우, 김우철 등과 함께 동인잡지 『별탑』을 발간하였다. 4집까지 내어놓고 일제에 의하여 잡지 발행이 금지되자 1932년 봄 일본 도쿄로 건너가 <적색구원회>, <일본전국산별로조협의회> 등 조직에 참가하여 일하면서 문학수업을 하였다. 1934년 2월 신병으로 고향에 돌아왔으나 ‘카프’사건에 관련되어 피검되었다가 그해 가을에 출옥하였다. 출옥 후 지난 생활체험에 기초하여 1934년에 시 <강동의 품>, <저녁의 지구> 등을 발표하고 문단에 등장하였으며 수편의 시와 소설을 써냈다. 그 후 일제의 혹심한 탄압으로 자유로운 창작의 길이 막히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문학수업과 창작활동을 계속하였다.
해방 후 귀국한 그는 1946년 2월부터 조선공산당 평안북도위원회 기관지 『바른말』편집에 종사하면서 작품창작을 하였다. 이 시기 그는 김일성에 대한 흠모와 신뢰의 마음을 담아 시 <김일성장군님께 바치는 송가>(1947)를 창작하였으며 그 외 <축제의 날도 가까워>(1947), <동백꽃>(1947) 등을 창작하였다. 조국해방전쟁시기에는 종군의 길에서 <나의 따발총>(1950), <파도소리 드높은 700리 낙동강에>(1950) 등 전투적인 시작품들을 발표하였다. 전후에 그는 작가동맹 평안북도 지부장, 현역작가로 활동하면서 1955년에 <전기로 불길 넘어>, <이른 봄에>, 1963년에는 <락원산수도>를 비롯하여 다양한 주제의 시작품들을 활발히 창작하였다.
1955년에 펴낸 『서정시선집』에 안룡만은 6.25 전쟁 중의 인민군대의 활약상과 용맹성을 찬양한 노래인 <나의 따발총>(1951)과 <포화 소리 드높은 칠백리 락동강에」를 게재했다.
1956년 조선로동당 제3차 당대회에 즈음하여 펴낸 『당의 기치 높이』(엄호석 편)에는 해방과 6.25 전쟁을 거치면서도 사회주의 건설에 매진하는 북한 인민대중들의 포부와 희망 그리고 보람을 그리는 ‘당’, ‘행복’, ‘심장’, ‘고향’, 웃음‘, 봄’ 등의 시어가 많이 등장하며 박팔양, 김북원, 서만일, 리맥, 박세영, 김순석 등의 시가 실려 있다. 안룡만도 시 <어머니 – 당의 노래>를 게재하고 ‘낡은 것과 새 것의 대립’이라는 고리끼식 접근법으로 당에 대한 충성심을 표현하고 있다.
북한에서 안룡만은 자기의 시작품들에서 언제나 현실에 민감하고 시대정신에 적극적인 시인으로서의 특징을 보여주면서 시인의 깊은 사색과 내면적 열정의 뜨거움으로 풍만한 서정세계를 펼쳐 보였다고 평가된다. 그의 작품집으로는 『동지애의 헌사』(1946), 『나의 따발총』(1951), 『안룡만시선집』(1956), 『새날의 찬가』(1964)가 있다.
동의어 안용만
관련연구(남) 박태상, 「새로 발견된 북한 ‘서정시선집’ 연구」, 『북한문학의 동향』, 서울: 깊은샘, 2002.
이인영, 「1950년대 북한 전쟁시의 개작 양상 연구: 안룡만의 전쟁시 개작 과정을 중심으로」, 『한국학연구』, 31권, 2013.
안룡만, 「나의 따발총」, 『근대서지』, 7권, 2013.

이미지

안룡만

이미지명 : 안룡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