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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홍식 [Kang Hongsik]
상세 정보 표
분야
인물별체계관리 > 영상 > 영화 > 영화연출가
9분류
인물
집필자
이명자
출생일
1902년 12월 9일
사망일
1971년 10월 9일
출생지
평양시 중구역
정의
영화 배우이자 영화 연출가이다.
내용
평양 출신인 강홍식은 평양 광성고보 2학년인 15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대성중학교 4학년까지 다녔다. 이후 동경오페라에 들어가 이시이 바쿠(石井漠)의 제자가 되었으나 테너로 성공하지 못하고 일본의 일활(日活)영화사에서 야마모토 가이치(山本嘉一)에게 연기를 배웠다. 1925년 <쌍옥루>, 1926년 <장한몽>과 <산채왕>에 출연하였다. 당시 ‘진훈’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했다.
1927년 귀국하여 심훈이 감독한 <먼동이 틀 때>에 주연으로 출연하였다. 심훈은 당당한 체구와 매력적인 음성을 지닌 강홍식을 배우로서 최고라고 평가하였다고 한다. 영화의 주제가를 직접 부르기도 하였으며 ‘조선 타령’, ‘처녀 총각’, ‘봄 총각 봄 처녀’, ‘항구의 애수’, ‘배따라기’ 등 많은 노래를 레코드로 취입한 가수이기도 하다. 이후 강홍식은 연극계로 진출하여 취성좌를 거쳐 조선연극사에 참여하였는데 조선연극사에서는 무대감독의 중임을 맡았다. 1933년 무렵 부인인 전옥과 함께 조선연극사를 탈퇴하고, 빅터레코드사와 전속 계약을 맺고 활동하였다.
일제 말기에 <복지만리>(1938), <집 없는 천사>(1941), <망루의 결사대>(1943), <거경전>(1944) 등 친일 영화에 출연하였다.
평양에서 해방을 맞은 강홍식은 국립영화촬영소의 연출가로 활동하며 기록영화 <3.8선>을 연출하였다. 이후 1948년 6월 북조선인민위원회 문화선전국 극장 관리처 안에 만들어진 ‘시나리오창작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고 1949년 북한 최초의 예술영화 <내 고향>의 연출을 맡았다. 6.25 전쟁 중 제작된 예술영화 <초소를 지키는 사람들>의 시나리오를 썼고 <바다는 부른다>(1956)에서는 배우로 출연했으며 <항쟁의 서곡>(1960), <붉은 신호탄>(1960), <청년 작업반장>(1962)의 연출을 맡는 등 북한에서도 여러 분야를 종횡하며 활약했다. 뚜렷한 이목구비와 서구적 외모 때문에 <최학신의 일가>의 리차드 역과 같이 북한 영화에서 외국인 역할을 맡기도 했다. 그의 아들 강효선, 강효순, 강효재 역시 연출가, 음악가, 배우이다. 또한 그의 딸 강효실과 외손자 최민수는 남한에서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동의어
진훈
참고자료
한국영상자료원 데이터베이스, http:// www.kmdb.or.kr, 검색일: 2015.01.08.
한상언, 『해방공간의 영화 영화인』, 서울: 이론과 실천, 2013.
북한지역정보넷, httpwww. cybernk.net, 검색일: 2015.01.08.
이미지
강홍식
이미지명 : 강홍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