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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 [Kang 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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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인물별체계관리 > 영상 > 영화 > 영화미술가
9분류
인물
집필자
이명자
출생일
1908년 8월 6일
사망일
1984년 7월 3일
출생지
경상남도 창원군 진전면 봉곡리
정의
영화미술, 무대미술, 영화이론에 기여한 월북 영화인이다.
내용
어려서부터 문학과 미술에 취미가 있었던 강호는 보통학교를 최우등 성적으로 마치고 서울에서 사립중등 학교에 들어갔으나 학비를 내지 못해 퇴학당한 후 1921년 혈혈단신으로 현해탄을 건너 일본에서 교토 회화 전문학교를 고학으로 졸업했다. 1924년부터 2년간 일본의 거리를 방황하며 식당 점원, 신문사 광고 선전 일들을 하였다.
귀국 후 영화예술협회의 연구생으로 활동하며 연출 수업을 받았다. 1927년 프롤레타리아문학예술동맹(카프)에 가입 미술부장을 맡았다. 카프의 기관지인 『예술운동』 (1927년11월 창간), 아동문예잡지 『별나라』, 『신소년』의 표지 삽화에 관여하는 한편, 카프 영화부 기관지인 『영화 부대』 의 책임 편집을 담당하였다. 한편 카프 영화부 직속 단체인 ‘조선영화예술협회’를 1927년 3월 윤기정, 김태진, 김영팔 등과 조직하여 연구생으로 있으면서 적극 사업에 참여하였다.
1928년 <암로>를 연출하며 시나리오, 배우, 연출을 맡았으나 많은 한계를 드러내었다. 축적한 경험을 바탕으로 1931년 노동계급의 투쟁을 최초로 형상화한 <지하촌>을 연출하였다. <지하촌>에서도 시나리오, 연출, 배우를 맡았는데 이 작품은 진보적 영화인과 평론가들로부터 ‘나운규의 <아리랑>과 쌍벽을 이루는 작품’, ‘<아리랑>보다 무산계급의 권익에 더 접근한 영화’라는 평가를 받았다.
1932년 체포되어 3년간 투옥되었으며 1938년 ‘공산주의자협의회 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어 1942년까지 투옥되었다. 해방 후 서울에서 ‘남조선연극동맹’을 조직하여 조령출, 박학, 태을민, 황영일, 김세영이 참여한 <혁명군>, <옥문이 열린다>, <논개> 등에도 관련하여 일하였다. 또 추민과 더불어 좌파 성향의 영화이론을 제기하였다. 1946년 박헌영의 문화노선을 반대하는 성명을 송영, 박세영 등과 함께 낸 후 월북한다.
월북 후 1946년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지도원, 북조선연극동맹 서기장을 맡았으며 1951년 전쟁 중 <또 다시 전선으로>의 시나리오와 무대미술을, 1961년 4월 예술학 부교수학직을 받았다. 그 외에도 가극단 단장, 국립예술극장 총장, 조선화보사 사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영화미술』, 『무대미술의 초보』, 『해방 전 우리나라 살림집과 생활양식』(1980), 『해방 전 우리나라 옷 양식』(1981)이 있다.
전쟁 중 시나리오와 무대미술을 맡았던 작품 <또 다시 전선으로>가 카를로비 바리 영화제에서 ‘자유를 위한 투쟁상’을 받았으며 1965년 영화미술 ‘생의 노래’로 ‘국가미술전람회’에서 2등에 입상했다.
해방 전후 시기 좌파 영화이론가 중 대표적 인물로 남북한에서 영화 및 무대 미술가의 선각자로 평가받는다.
관련자료(북)
소희조, 「강호와 그의 창작활동들」, 『조선영화』, 제3호,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