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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정식 [Min Chongsik]
상세 정보 표
분야
인물별체계관리 > 영상 > 영화 > 영화연출가
9분류
인물
집필자
이명자
출생일
1916년
사망일
사망일 미상
출생지
대구 대신동
정의
월북 영화인으로 영화 연출가 및 평양연극영화대학 교수를 역임했다.
내용
1916년 대구에서 태어나 계성학교를 나왔으며 18세에 일본에서 영화 조감독 수업을 마쳤다. 민정식은 별명이 ‘차돌이’일 정도로 냉정하고 머리가 비상했다고 한다. 해방 후 귀국하여 1945년 11월에 결성된 ‘프롤레타리아영화동맹’과 1945년 12월 16일에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과 조선영화건설본부의 통합으로 결성된 ‘조선영화동맹’의 집행위원 등 좌파 영화 운동에 참여하다 월북했다.
월북하여 북한의 두 번째 예술영화 <용광로>(1950)의 연출을 맡았다. 최초의 컬러 와이드 스크린영화 <영광스런 우리 조국>(1960)과 음악무용극을 영화화 한 <밝은 태양 아래>(1964) 등의 연출에서는 영화사에 기록될 만한 새로운 영화적 시도를 하였다. <밝은 태양 아래>는 유원준에 의해 1969년 <밝은 태양 아래에서>로 리메이크되었다.
북한의 다른 분야 초기 예술인들과 마찬가지로 민정식은 소련의 영화이론과 영화에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그것을 북한 영화 연출과 수업에 적용하려 하였다.
평양연극영화대학 강좌장을 역임했으며 국립영화촬영소의 소장을 역임하였고 1971년 9월 공훈배우 칭호, 1982년 4월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았다. 민정식보다 두 살 위인 형 민경식은 남한에서 <태양의 거리>(1952), <구원의 애정>(1955), <내일 없는 그날>(1959) 등을 연출한 감독이며, 조카 민병진(민경식의 차남)도 극장 간판 제작 등 영화 관련 일을 하고 있다.
연출작은 <조국의 아들>(1956), <북두칠성은 보이건만>(1959), <영광스런 우리 조국>(1960), <뜨거운 심정>(1963), <밝은 태양 아래>(1964), <혈육>(1979)등이 있다.
관련어
평양연극영화대학
,
국립영화촬영소
,
공훈배우
,
인민예술가
관련자료(북)
민정식, 「로동계급을 형상한 첫 예술영화에 깃든 이야기」, 『조선영화』, 4호, 2000.
참고자료
『중앙일보』, 1952년 6월 11일.
정종화, 「영화사 기술을 위한 증언-민경식감독편」: 『영화언어』, 겨울,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