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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영화 [art film]

상세 정보 표
분야 장르별체계관리 > 영상 > 영화
9분류 개념
집필자 오양열
시기1949년 이후
정의
객관적 현실을 극적 방식으로 보여주는 영화예술의 한 형태이다.
기원
1949년 북한 최초의 예술영화 <내 고향>이 제작되었다. 영화 역사에서 예술영화는 시보영화나 기록영화보다 뒤늦게 발생하였으나, “사람들의 사상문화생활에 주는 거대한 영향력으로 인하여” 오늘날에는 영화예술의 대표적인 종류가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영화가 예술로서의 면모를 갖춤으로써 예술영화를 탄생시키게 된 것은 영화가 문학에 기초하여 창작되고 영화 화면에 배우가 등장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변천
북한은 예술영화가 "1920년대 초부터 창작되기 시작하였으나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정책으로 인하여 제대로 발전하지 못하다가 해방 후 김일성의 현명한 령도와 육친적 배려" 밑에 참다운 개화 발전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특히 1960년대 후반기로부터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김정일이 주도한 ‘제1의 문학예술혁명’ 시기에 예술영화분야에서 ‘혁명적 대작’들이 연이어 창작되고 <피바다> 등 ‘불후의 고적적 명작’들이 영화로 옮겨지면서 예술영화는 전환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1980년대 말부터 국가 경제사정이 악화되고 주민들의 생활도 어려워지면서 강제동원식의 문화향수정책에 주민들이 식상해 하고 반발의 기운마저 일자, 북한 당국은 사회주의적인 내용을 고수하되 그 전달방법을 보다 인민대중들의 구미에 맞는 방향으로 선회하는 등 이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 바 있다.
내용
예술영화가 시보영화 등 기록영화와 다른 점은 극적인 인간 성격과 극적인 사건들을 주된 형상대상으로 하며 화폭도 극적으로 펼쳐나간다는 점, 현실의 인간 성격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개성화와 일반화를 통해 하나의 새로운 인간 성격을 전형화한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북한의 예술영화 성과작으로는 <해운동의 두 가정>(1996), <자강도 사람들>(2000), <푸른 주단 우에서>(2000), <살아있는 령혼들>(2000), “민족과 운명” <어제, 오늘 그리고 래일>(2001), <세대의 임무>(2002), <우물집 녀인>(2002), <녀병사의 수기>(2003), <존엄>(2004), <한 녀학생의 일기>(2006),<내가 본 나라>(2010), <인민이 너를 아는가>(2011) 등이 꼽히고 있다.
북한에서 영화는 ‘직관예술’이라하여 문학과 더불어 대중교양의 중요한 수단으로서 간주되고 있으며, 특히 극영화를 일컫는 예술영화는 풍부한 예술적 효과로 인하여 근로자들을 사상적으로 교양하는 ‘힘 있는 무기’가 되고 있다. 북한의 공장, 기업소, 협동농장 등에서는 월 1~2회 영화를 관람하는데, 관람 후에는 ‘영화실효투쟁’이라 부르는 토론회 참석이 의무화된다.
대응어 기록영화
동의어 극영화
관련연구(남) 민병욱, 「북한영화예술의 장르론적 연구」, 서울, 한중인문학연구, 20집, 2007.
관련자료(북) 백과사전출판사 편, 『광명백과사전 6: 문학예술』, 평양: 백과사전출판사, 2008.
「공화국과 함께 걸어온 영화예술의 40년」, 『조선영화』, 12호, 1988.
「주체적 영화예술발전의 영광스러운 20년」, 『조선예술』, 12호, 1984.
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 편, 『문학예술사전』, 평양: 사회과학출판사, 1972.
참고자료 백과사전출판사 편, 『광명백과사전 6: 문학예술』, 평양: 백과사전출판사, 2008.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편, 『문학예술사전 하』, 평양: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93.
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 편, 『문학예술사전』, 평양: 사회과학출판사, 19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