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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수복 [Wang Supok]

상세 정보 표
분야 인물별체계관리 > 음악 > 민족음악 > 성악가
9분류 인물
집필자 배인교
출생일1917년 4월 23일
사망일2003년 6월 1일
출생지평안남도 강동군 입석면 남경리(현재 평양시 삼석구역 호남리)
정의
평양권번 출신 기생가수이자 민요가수로, 국립교향악단 성악가수, 조원예술단 소속 해외공연, 윤이상음악연구소 명예연구자 등으로 활동했다.
용례/관용구
왕수복민요독창회는 우리 당원들과 근로자들을 민족제일주의정신으로 교양하는데서 민요가 큰 역할을 하며 우리 당이 민족음악발전에 얼마나 깊은 관심을 돌리고있는가를 잘 보여준 의의있는 독창회였다. 독고현순, 「젊음을 되찾은 로가수의 민요가락: 왕수복민요독창회를 보고」, 『조선예술』, 8호, 1997.
내용
평안남도에서 출생한 왕수복은 10살 때 평양가무양성소(구 평양권번, 기성권번이라고도 함)에서 김밀화주에게 가사와 시조, 가야금, 장고, 무용 등을 사사하였다. 1932년부터 음반회사에 소속되어 신민요와 대중가요를 취입하였다. 콜롬비아레코드에서 <연꽃따는 처녀>, <울지 말어요> 등을 발표하였으며, 폴리돌레코드에서 <고도의 정한>을 취입한 후 스타덤에 올랐다. 1930년대 중반에는 일본으로 유학하여 벨칸토창법을 배웠으며, 1942년에 귀국 후 리면상의 곡 <울산타령>, <포곡성(뻐꾹새)>을 발표하였다. 일제시대에 소설가 이효석과 스캔들이 있었으며, 월북한 경제학자 김광진과 결혼하면서 북한에 정착하였다.
1955년에 국립교향악단 성악가수로 있었으며, 1959년 새해 경축공연에서는 <어화 우리 농민들아>, <조선팔경가> 등을 부르기도 하였다. 그리고 1959년에 공훈배우가 되었으며 1973년에 노력훈장을 받았다. 1960년대 초에는 소련, 중국, 몽골을 방문하여 공연하던 조선예술단에 소속되어 공연을 하였다. 윤이상음악연구소의 명예연구사로 있으면서 1997년 6월에 80세 생일을 기념하여 ‘왕수복민요독창회’를 갖기도 하였다. 왕수복은 2003년 6월에 사망하여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었다.
왕수복은 일제시대에 신민요보다는 유행가를 더 많이 취입하였다. 폴리돌레코드에서 유행가는 왕수복, 신민요는 선우일선을 내세운 점을 보더라도 유행가에 장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왕수복의 시작은 평양권번 출신의 기생들이 가수로 진출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관련어 기생가수, 김광진, 공훈배우, 노력훈장
동의어 왕성실, 王壽福
관련연구(남) 신현규, 『기생이 쓰는 기생이야기』, 서울: 경덕출판사, 2006.
관련자료(북) 장영철, 『조선음악명인전』, 평양: 윤이상음악연구소, 1998.
독고현순, 「젊음을 되찾은 로가수의 민요가락: 왕수복민요독창회를 보고」, 『조선예술』, 8호, 1997.
공훈배우 왕수복, 「여든살에 독창회에 출연하였습니다」, 『조선예술』, 8호, 1997.
참고자료 김덕균·김득청 외, 『조선민족음악가사전 (상)』, 연길: 연변대학출판사, 1998.

이미지

왕수복

이미지명 : 왕수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