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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남 [Kim Sunnam]

상세 정보 표
분야 인물별체계관리 > 음악 > 양악 > 작곡가
9분류 인물
집필자 노동은
출생일1917년 5월 28일
사망일1983년 추정
출생지경기도 신설정 132(서울 동대문구 신설동 132-1번지)
정의
북한에서 교육자, 작곡가로 활동한 월북 음악인이다.
내용
김순남은 경성사범학교에 진학, 음악부장과 취주악대 악장으로 그 재능을 돋보였다. 1937년 9월 동경고등음악학원 본과 작곡부에 입학, 일본현대작곡가연맹 소속 음악평론가로 활동, 평론가인 야마네 긴지(山根銀二)와 함께 『음악평론』지를 발행하였다. 1940년 4월 동경제국음악학교 3학년으로 전학, 작품 <피아노 소나타 제1번>이 일본현대작곡가연맹에 선정되어 발표되었다. 1942년 졸업, 한국으로 돌아온 김순남은 지하음악서클인 성연회에서 해방을 준비하였다. 김순남은 1942년 12월에 제1회 작곡발표회를 가졌으며, <자유의 노래>를 작곡하였다. 1945년 12월 조선음악가동맹 작곡부장으로 활동하며 1946년 8월 <제1교향곡>을 완성하였다. 가곡집 『산유화』(1947)와 『자장가』(1948)를 발행하였지만, 수도경찰청장의 체포령으로 1948년 7월 말 월북한다. 해주음악전문학교 작곡교수, 해주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거쳐 같은 해 8월 말 평양에 진출한 뒤로는 조선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위원회 위원, 국립음악학교(현 평양음악대학) 작곡학부 학부장, 조선음악동맹 부위원장 등 음악가로서 북한 최고의 서열에 올랐다. 김순남은 1952년 모스크바의 차이코프스키 음악원 이론작곡학부 연구생이 되었으나, 1953년 북한 당국의 소환으로 유학을 포기한다. “반당적, 반인민적 음악가이자 부르주아 음악가”로 비판 받은 김순남은 1960년대초 함경남도 신포시로 좌천, 신포기업소 내 주물공장 노동자로 생활했다. 1960년대 중반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받은 김순남에게 창작활동이 다시 주어졌으나, 김순남은 돌이킬 수 없는 전염성 폐병을 얻어 1983년쯤 사망하였다.
관련어 자유의 노래
관련연구(남) 노동은, 『김순남 그 삶과 예술』, 서울: 낭만음악사, 1992.

이미지

김순남

이미지명 : 김순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