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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률성 [Chong Ryulsong]

상세 정보 표
분야 인물별체계관리 > 음악 > 양악 > 작곡가
9분류 인물
집필자 노동은
출생일1914년 7월 7일(음력)
사망일1976년 12월 7일
출생지전라남도 광주군 광주면 양림리
정의
한국 광주 출신의 작곡가로, 중국과 북한에서 작곡으로 크게 명성을 떨친 음악가이다.
내용
정률성은 부모의 민족적인 교회활동, 그리고 형제들의 항일운동에 영향을 받으며 광주 숭일학교를 졸업하였다. 전주 신흥학교로 진학한 정률성은 1930년 광주학생독립운동 가담과 학교와 교회의 신사참배거부운동에 참여하였다. 1933년 중국에서 조선혁명군군사정치간부학교에 입교하고 의열단에 가입했다. 1937년 연안의 협북공학, 1938년 3월부터 노신예술학원 음악학부에서 수학하며 <연안송>을 작곡, 모택동·주은래·주덕 등이 명작으로 주목하며 함께 항일의식을 불태웠다. 졸업후 항일군정대학 정치부 선전과 음악지도원, 그리고 1939년 중국공산당 가입시 <연수요>를 비롯 <팔로군 대합창>을 작곡하였다. 이 곡 중에서 팔로군의 전투적 정신과 기상을 표현한 <팔로군 행진곡>이 이후 중국의 <중국인민해방군 군가>(1988)로 비준 받아 현재에 이른다. 1941년 말에 항일군정대학 출신인 정설송과 결혼한다. 1942년 태항산에서 한국독립운동가들이 화북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 등을 조직하고, 화북조선혁명군사학교를 설립하자 정율성은 무정 장군이 교장인 화북조선혁명군사학교 교무부장이 되어 활동했다.
1945년 8월 해방이 되자 정률성은 중국공산당의 결정으로 가족과 함께 평양으로 귀국한다. 1946년 1월 황해도 선전부장이면서 해주음악전문학교를 설립하였다. 1947년 봄 평양의 보안간부훈련대대부협주단(조선인민군협주단의 전신)을 창건하여 초대 단장 역임, 1949년에 평양음악대학 작곡학부장이 되었다. 이 기간 정률성은 <조선인민군행진곡>을 비롯하여 합창곡 <동해어부> 등을 창작하였다. <조선인민군행진곡>은 후에 북한의 <조선인민군가>로 결정되었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중국 정부의 요청을 받아 중국으로 되돌아간다. 1951년부터 1966년까지 중국의 건국 초기에 정률성은 북경인민예술극원에 이어 중앙악단 등에 근무하면서 <흥안령에 눈 내리네>, <우의평화행진곡> 등을 창작하였다. 그리고 합창을 곁들인 오페라 <망부운>과 영화, 연극음악도 창작하였다. 그러나 1959년에 ‘반당’이라는 누명을 쓰고 비판 받았고, 1966년 5월부터 10년간 지속된 문화대혁명 시기에 정률성은 감금되고 노동교양을 받았으며 창작 권리마저 박탈당하였다. 1976년 문화대혁명의 종결과 함께 의욕적인 창작열정을 보였지만 12월에 뇌일혈로 죽었다. 1977년 12월 북경에서 중국음악가협회 주최로 ‘정률성 서거1주년 기념음악회’가 개최되었다. 2005년부터 광주에서 정율성국제음악제가 개최되고, 조직위원회 편으로 『정율성 작품집』Ⅰ,Ⅱ권을 발행하였다.
관련어 조선인민군행진곡, 조선인민군협주단
동의어 정율성, 鄭律成
관련연구(남) 노동은, 『정율성의 삶과 예술』, 광주정율성국제음악제조직위원회, 2005.
관련자료(북) 김덕균·김득청 외, 『조선민족음악가사전 (상)』, 연길: 연변대학출판사, 1998.
참고자료 이종한, 『항일전사 정율성 평전』, 서울: 지식산업사, 2006.

이미지

정률성

이미지명 : 정률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