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검색 결과 바로가기
HOME > 디렉토리 서비스 > 가나다색인
이전 다음 A+ A- 인쇄

최승희무용연구소 [Choe Sung Hui Dance Research Institute]

상세 정보 표
분야 장르별체계관리 > 공연 > 무용
9분류 조직
집필자 한경자
시기1946년
정의
1940년대 민족무용예술의 새로운 발전을 위하여 연구와 공연 및 후진 양성을 위해 창립된 북한의 전문무용교육기관이다.
규모와 구성
1946년 월북과 함께 최승희는 김일성의 전폭적인 배려로 평양 최고의 실습장을 갖춘 최승희무용연구소와 무용단을 갖게 되었다. 북한 각지에서 선발된 우수한 학생들이 모여들었고 1950년 6월 초에는 2백명의 대규모 예술단과 역시 단원이었던 딸 안성희를 데리고 모스크바 등 소련 각지를 돌며 공연을 하기도 하였다.
6.25 전쟁이 일어난 후에 최승희는 중국으로 거처를 옮겨 활동하며 200여 명의 무용가를 양성하였고, 1952년 11월 북한에 귀환한 후 국립최승희무용연구소는 재학생 800명으로 확대되었다.
내용
1946년 10월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산하에 북조선무용가동맹에서 출발한 최승희무용연구소는 북한민족무용예술의 새로운 발전을 위하여 무용예술에 관한 연구와 공연뿐만 아니라 조국과 인민대중에 헌신하는 새로운 무용가의 후진들을 양성하기 위해 창립되었다.
김일성은 대동강변의 요정이었던 동일관 자리에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설립하게 해주었다. 최승희무용연구소에는 각지에서 선발된 학생들이 모여들게 되었으며, 김일성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게 된 최승희는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자신의 춤을 창작하는데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 시기에 북한은 국가적인 사업으로 무용예술인들에게 모든 창작여건을 보장해 주면서 많은 작품들이 창작되었고, 북한 인민대중의 충성심을 형상화하는 것은 해방 후 무용예술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1950년에 전쟁이 일어나자 최승희와 연구소 학생들은 김일성의 배려로 중국으로 거처를 옮겼고, 베이징에 있는 중앙희극학원에 ‘최승희무용반’이 설립되어 새로운 활동무대가 제공되었다. 무용반에서 북한학생과 함께 중국의 소수민족중에서 선발된 학생들을 지도하였다. 북한민족무용의 기본과 중국무용(경극)의 기본에 대한 정리 작업도 진행하였다. 최승희무용연구소는 전쟁 이후 북한 무용의 본산으로 기능하며 전통무용의 체계화와 무용극창작에 몰두하였고, 북한 민족무용에 대한 연구와 새로운 민족무용의 양식화를 위해 노력했다.
최승희무용연구소는 1952년 국립최승희무용극장 부속의 최승희무용학교를 거쳐 1956년에는 국립최승희무용학교로, 1958년 최승희의 숙청으로 국립무용연구소로 개칭되어 1961년 1월 조선무용가동맹이 부활되기까지 북한 무용의 중심 단체로서의 기능을 계속하였다. 1962년 평양예술대학으로 승급된 뒤 1972년 평양음악대학과 통합해 평양무용음악대학으로 현재까지 존속하고 있다.
관련어 국립무용극장, 평양무용음악대학
관련자료(북) http://cafe.naver.com/sis1229/860, 검색일: 2014.09.26.
http://cafe.naver.com/sis1229/861, 검색일: 2014.09.26.
참고자료 김채원, 『최승희춤』, 서울: 민속원, 2008.
정병호, 『춤추는 최승희』, 서울: 현대미학사, 2004.
Daum 백과사전,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do?docid=b20c3237a , 검색일: 2014.09.30.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7438, 검색일: 2014.09.30.
http://www.rfa.org/korean/weekly_program/media_in_out/inout-11302011104437.html, 검색일: 2014.09.30.

이미지

최승희 무용연구소

이미지명 : 최승희 무용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