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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쾌대 [Ri Kwaetae]

상세 정보 표
분야 인물별체계관리 > 미술 > 작가 > 회화 > 유화
9분류 인물
집필자 박계리
출생일1913년 1월 16일
사망일1965년 2월 20일
출생지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신동
정의
리쾌대는 인물화를 주로 그린 유화가이다.
내용

1928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서양화가 장발(張勃)의 지도를 받았다. 1932년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정물>로 입선하였다. 1934년 일본 제국미술학교에 입학, 1938년 졸업하였다. 이후 재동경미술가협회전람회에 참여하고, 1939년, 1940년 일본 니카전(二科展)에서 입선하였다. 1941년에는 이중섭, 최재덕, 진환, 문학수 등과 함께 조선신미술가협회를 조직하였다. 1944년 동경, 서울에서 동인전을 개최하였다. 해방 이후 조규봉과 조형예술동맹을 만들고, 조선미술동맹에서 간부활동을 했다. 1947년 조규봉, 김정수, 리석호와 강원도에 설치할 해방탑 문제로 북한을 방문한 뒤 조선미술문화협회를 결성하였다. 1948년 보도연맹에 가입하여 반공포스터 전람회를 개최하였다. 1948년에 성북회화연구소를 개설, 이후 남산에 시립연구소를 만들기도 하였다. 1949년 제1회 국전 서양화부 추천작가로 <추과>를 출품하였다. 그러나 6.25 전쟁 때 종군화가로 활약하던 중 포로가 되었고, 이후 남북 포로교환 때 월북하였다. 전후 건설성 미술제작소에서 활동했다. 또한 조선미술가동맹에 소속되어 평양시, 자강도에서 창작활동을 이어갔다. 1950년대 초부터 위병을 앓는 등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 1965년 갑자기 사망했다고 전한다. 그의 형 리여성은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미술사가이자 역사학자이다. 1957년 김일성종합대학 역사강좌장을 역임하였다.
리쾌대는 신고전주의 화풍에 토대를 둔 인물화를 많이 그려 높은 평가를 받았다. 김용준으로부터 필선과 질감 표현에 있어 동양화적 미감을 유화에 가미시켰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작품 초기에는 한국의 여인상을 주제로 한 작품이 다수 확인된다. 해방 이후의 작품은 군상이 다수로서, 절규하고 몸부림치는 극적인 인간상과 사실적인 묘사로 해방의 기쁨을 표현하였다. 해방 후 <조난(遭難)>(1948) 등을 그려 해방 후의 사회상을 담았다. 남한에서 그린 그림 중 대표작은 <작품>(1938), <운명>(1938), <부인도>(1943), <탁자 위의 정물>(1943), <걸인>(1948), <추과(秋果)>(1949) 등이다. 북한에서의 대표작은 <박연초상>(1956년), <우의탑벽화>(1958년),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1961년), <송아지>(1961년), <방목>(1961년) 등이 있다. 1961년 작 <송아지>로 국가미술전람회에서 2등을 수상했다.
리쾌대는 인물화에 뛰어났던 유화가이다. 북한 미술계에서는 해부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탄탄한 구도와 인물 표현에서 서양 신고전주의 미술의 특색을 보여주는 화가로 평가하고 있다.
관련어 국가미술전람회
동의어 이쾌대
관련연구(남) 안재환, 「월북화가 이쾌대의 작품세계에 대한 고찰」, 석사학위논문, 창원대학교, 1999 .
문연주, 「월북화가 이쾌대의 회화세계 : 인물화를 중심으로」, 석사학위논문, 대구대학교, 2000.
김선태, 「이쾌대의 회화 연구 : 해방공간의 미술운동을 중심으로」, 석사학위논문, 홍익대학교, 1993.
김경아, 「이쾌대의 군상 연구」, 석사학위논문, 서울대학교, 2003.
황홍배, 「이쾌대 작품 연구 : 인물화를 중심으로」, 석사학위논문, 전남대학교, 1995.
이미령, 「이쾌대 군상 연구 : 1948년작을 중심으로」, 석사학위논문, 이화여자대학교, 2002.
이구열, 「한 월북화가의 정당한 복권」, 신세계미술관, 『월북화가 이쾌대전』, 1991.
관련자료(북) 리재현, 『조선력대미술가편람』, 평양: 문학예술종합출판사, 1999.
참고자료 리재현, 『조선력대미술가편람』, 평양: 문학예술종합출판사, 1999.

이미지

리쾌대

이미지명 : 리쾌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