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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조주의 [dogmat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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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장르별체계관리 > 이론-공통 > 이론 > 개념
9분류 개념
집필자 박태상
시기1955년
정의
북한에서 말하는 교조주의는 자연과 사회를 개조하는 투쟁에서 주인다운 태도를 가지고 모든 문제를 창조적으로 풀어나가는 것에 대한 주체사상의 요구와 근본적으로 대치되는 사상관점을 뜻한다.
용례/관용구
교조주의에 반대하고 주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자주노선을 선언하고 중국을 교조주의, 제국주의와 입으로 싸우는 자. 논설 「자주성을 옹호하자」, 『로동신문』, 1966년 8월 12일.
기원
북한의 이론서들은 역사적으로 볼 때 교조주의는 종교가 지배하던 시기에 사람들이 종교교리를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고 따르던 것으로부터 생겨났다고 설명한다.
내용

교조주의의 인식론적 근원은 사물현상을 구체적으로, 역사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고립되고 고정불변한 것으로 보는 형이상학적 사고방식에 있다. 교조주의의 사회계급적 근원을 낡은 착취제도를 유지하기 위하여 그것을 절대적이고 고정불변한 것으로 꾸며대던 착취계급의 반동적 입장에 있다고 본다. 북한이론서들은 교조주의는 과거 봉건사회에서 사대주의에 물든 반동통치배들이 큰 나라를 숭배하고 그에 굴종하면서 남의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맹목적으로 따르던 악습으로부터 발생하였다고 설명한다.
교조주의는 사람들의 독자성과 창발성을 마비시켜 그들이 혁명과 건설에서 주인다운 태도를 가질 수 없게 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사실 교조주의에 대한 비판은 1955년 12월 28일 김일성이 당 선전선동 일꾼들 앞에서 한 연설인 「사상사업에서 교조주의와 형식주의를 퇴치하고 주체를 확립할 데 대하여」에서 이루어졌으며, 이 연설을 통해 처음으로 주체의 문제를 언급하게 되었다. 이러한 비판은 스탈린의 사망 후에 바로 종파투쟁으로 이어진다.
제1차 5개년 경제계획의 추진을 위한 경제원조를 위해 김일성이 1956년 6월 1일부터 7월 14일까지 소련과 동유럽을 방문하던 중 최창익이 이끄는 연안파가 김일성 정권에 도전하였다. 1956년 8월 30일에 당중앙위원회 ‘8월 전원회의’가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 연안파의 서휘는 직업동맹의 노동자들이 정치적 자주성과 파업의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윤공흠은 김일성에 대한 개인숭배를 비판하였다. 최창익은 경제발전의 난관을 초래하는 중공업에 치중을 비난하고 생필품의 생산확대를 위해 경제계획을 개편할 것을 촉구했다. 그리고 군부에서는 연안파의 김을규, 최월종, 최종학 등이 인민군의 전통은 비조선적인 만주에서의 빨치산 전통보다는 일체 치하의 북한에서 치열하였던 농민운동에서 계승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맞서 김일성은 1956 ~ 57년 사이에 당증 재발급 사업을 벌이면서 연안파의 인물들을 사대주의, 교조주의에 젖어있다고 하면서 당과 정부에서 축출했다. 또 소련파인 박창옥과 그 측근들도 사대주의적 행동을 일삼았고 부르주아의 사상잔재가 남아있다고 비판하면서 숙청을 단행했다.
‘8월 종파사건’을 계기로 표면화된 파벌 대립과 ‘반종파투쟁’은 북한에서 주체 확립 움직임이 가시화되는 중요한 기폭제가 되었다.
관련어 반종파투쟁, 형식주의, 수정주의
관련연구(남) 이정식, 「수정주의와 교조주의」, 『北韓』, 4권, 1972.
이종석, 『현대북한의 이해』, 서울: 역사비평사, 2000.
박태상, 『북한문학의 현상』, 서울: 깊은샘, 1999.
관련자료(북) 백과사전출판사 편, 『조선대백과사전2』, 평양: 백과사전출판사, 1995.
참고자료 사회과학출판사, 『철학사전』, 평양: 사회과학출판사, 1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