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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장 창작실 [Usanjang Office of Creative Arts]

상세 정보 표
분야 장르별체계관리 > 문학
9분류 조직
집필자 최진이
시기1960년대 초
내용
조선작가동맹 우산장 창작실은 조선작가동맹 작가들의 창작활동을 위한 창작기지로서 평안남도 남포역에서 30리쯤 떨어진 산간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우산장은 일제 때 유흥지였으나 해방 후 농민휴양소로, 전후에는 정부초대소로 바뀌었다가 김일성의 문학예술부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던 1960년대 중반, 김일성 교시에 의해 작가들의 창작기지로 문예총에 이관되었다.
우산장 창작실은 입구 전방에 커다란 호수가 펼쳐져 있고 골짜기마다에 1호각(김일성각), 소설가각(13각), 시인각, 아동문학각, 휴양각들이 송림에 둘러싸여 있다. 각 동 내부바닥은 마루(혹은 대리석, 주단)로 되어 있다. 화장실과 세면장이 동마다 있어 비록 찬물이긴 하지만 목욕이 항시 가능하다. 입소자의 기상시간은 아침 6시, 취침시간은 저녁 10시로 규정되어 있으나 대개 자유로운 편이다. 입퇴실 시 각 책임자(작가)에게 신고하며 정해진 식사시간만 어기지 않으면 된다.
1호각: 북한식 청기와 지붕으로 된 1호각은 김일성 특각이었으나 김일성 사후 소설가 창작실로 바뀌었다. 1인 1실, 1회당 10여 명 수용 가능하며 장편소설 창작가들이 주로 이용한다.
소설가각: 여객선 모양의 3층 건물로써 2인 1실, 1회에 100여 명 수용 가능하다.
시인각: 2층으로 된 별장형 건물과 1자형 건물이 있는데 1회 20여 명 수용 가능하다. 1실 1~2명, 4~5명 용이 있다.
아동문학각: 15명 정도 수용할 수 있는 산등성이의 단층시설이다.
휴양각: 작가들의 휴양을 위한 공간이며 식당이 따로 있어 음식의 질이 특별히 높다. 휴양각에 입소한 작가는 휴양기간 동안 조직생활에서 제외된다.
우산장의 식당은 약 5개 정도이다. 음식은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1990년대에도 가끔 삶은 계란과 우유가 나오고, 2일에 한 번씩은 고기국이 나올 정도로 양호한 편이다. 식당 부식물은 자체 농장에서 전담한다.
우산장에서 창작활동을 하는 작가는 주 1회 생활총화에만 참가하며 가끔 중앙당 지도원이 내려와 김정일의 최근지시를 전달할 때 정해진 시간에 1호각에 모이기도 한다. 우산장에서의 창작기간은 대부분 본인의 요구에 의해 정해지는데 중, 장편소설창작가는 수년, 단편소설 창작가는 몇 달~1년, 시인들은 몇 일~몇 주 머무르는 것이 보통이다.
우산장행을 원하는 현역작가는 조선작가동맹 분과의 출장대장 해당란에 출장내용을 기입하여 분과위원장의 승인을 받은 뒤 기요과에 행선지가 “남포시”, 출장목적이 “취재”로 된 출장증명서를 신청해야 한다. 출장증명서는 신청한 다음날 나온다. 출장비는 차비와 도시락비만 경리과에서 제공되며 해당 끼니만큼의 양권은 경리과에서 미리 지급받아 가지고 가서 우산장 식당에서 식사할 때마다 한 장(200그램)씩 내야 한다.
남포역에서 내리면 버스가 없어 지나가는 자동차를 얻어 타거나 걸어야 한다. 평양 중앙에서 전용왕복버스가 가끔 있어 작가들이 이용하기도 한다. 13각 뒷산에는 그곳에서 창작하다가 사망한 작가들의 분묘 몇 기가 있다.
남포 우산장 창작실은 북한 문학작품 산실의 의미가 있다. 1970~1980년대 발행된 문학작품들에 그 마무리가 “우산장에서”로 되어 있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보이는 바 북한 문학작품의 80% 이상이 우산장 창작실에서 생산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음으로 작가들이 창작 이외의 활동 즉 토요학습, 수요강연회, 금요노동 및 온갖 동원사업에서 벗어나(모내기와 같은 총동원기간에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작가들의 우산장 출장이 불허됨) 창작에 전념할 수 있게 한 의미가 있다. 또한 작가들이 비교적 자유로운 토론을 벌일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였다. “우산장에서 한 말은 우산장 밖으로 내가지 않는다”는 작가들의 불문율이 지금껏 어겨진 적 없다는 사실은 우산장이 작가들에게 제공한 무형적 의미를 깨닫게 해 주는 부분이다.
내용
조선작가동맹 우산장 창작실은 조선작가동맹 작가들의 창작활동을 위한 창작기지로서 평안남도 남포역에서 30리쯤 떨어진 산간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우산장은 일제 때 유흥지였으나 해방 후 농민휴양소로, 전후에는 정부초대소로 바뀌었다가 김일성의 문학예술부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던 1960년대 중반, 김일성 교시에 의해 작가들의 창작기지로 문예총에 이관되었다.
우산장 창작실은 입구 전방에 커다란 호수가 펼쳐져 있고 골짜기마다에 1호각(김일성각), 소설가각(13각), 시인각, 아동문학각, 휴양각들이 송림에 둘러싸여 있다. 각 동 내부바닥은 마루(혹은 대리석, 주단)로 되어 있다. 화장실과 세면장이 동마다 있어 비록 찬물이긴 하지만 목욕이 항시 가능하다. 입소자의 기상시간은 아침 6시, 취침시간은 저녁 10시로 규정되어 있으나 대개 자유로운 편이다. 입퇴실 시 각 책임자(작가)에게 신고하며 정해진 식사시간만 어기지 않으면 된다.
1호각: 북한식 청기와 지붕으로 된 1호각은 김일성 특각이었으나 김일성 사후 소설가 창작실로 바뀌었다. 1인 1실, 1회당 10여 명 수용 가능하며 장편소설 창작가들이 주로 이용한다.
소설가각: 여객선 모양의 3층 건물로써 2인 1실, 1회에 100여 명 수용 가능하다.
시인각: 2층으로 된 별장형 건물과 1자형 건물이 있는데 1회 20여 명 수용 가능하다. 1실 1~2명, 4~5명 용이 있다.
아동문학각: 15명 정도 수용할 수 있는 산등성이의 단층시설이다.
휴양각: 작가들의 휴양을 위한 공간이며 식당이 따로 있어 음식의 질이 특별히 높다. 휴양각에 입소한 작가는 휴양기간 동안 조직생활에서 제외된다.
우산장의 식당은 약 5개 정도이다. 음식은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1990년대에도 가끔 삶은 계란과 우유가 나오고, 2일에 한 번씩은 고기국이 나올 정도로 양호한 편이다. 식당 부식물은 자체 농장에서 전담한다.
우산장에서 창작활동을 하는 작가는 주 1회 생활총화에만 참가하며 가끔 중앙당 지도원이 내려와 김정일의 최근지시를 전달할 때 정해진 시간에 1호각에 모이기도 한다. 우산장에서의 창작기간은 대부분 본인의 요구에 의해 정해지는데 중, 장편소설창작가는 수년, 단편소설 창작가는 몇 달~1년, 시인들은 몇 일~몇 주 머무르는 것이 보통이다.
우산장행을 원하는 현역작가는 조선작가동맹 분과의 출장대장 해당란에 출장내용을 기입하여 분과위원장의 승인을 받은 뒤 기요과에 행선지가 “남포시”, 출장목적이 “취재”로 된 출장증명서를 신청해야 한다. 출장증명서는 신청한 다음날 나온다. 출장비는 차비와 도시락비만 경리과에서 제공되며 해당 끼니만큼의 양권은 경리과에서 미리 지급받아 가지고 가서 우산장 식당에서 식사할 때마다 한 장(200그램)씩 내야 한다.
남포역에서 내리면 버스가 없어 지나가는 자동차를 얻어 타거나 걸어야 한다. 평양 중앙에서 전용왕복버스가 가끔 있어 작가들이 이용하기도 한다. 13각 뒷산에는 그곳에서 창작하다가 사망한 작가들의 분묘 몇 기가 있다.
남포 우산장 창작실은 북한 문학작품 산실의 의미가 있다. 1970~1980년대 발행된 문학작품들에 그 마무리가 “우산장에서”로 되어 있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보이는 바 북한 문학작품의 80% 이상이 우산장 창작실에서 생산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음으로 작가들이 창작 이외의 활동 즉 토요학습, 수요강연회, 금요노동 및 온갖 동원사업에서 벗어나(모내기와 같은 총동원기간에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작가들의 우산장 출장이 불허됨) 창작에 전념할 수 있게 한 의미가 있다. 또한 작가들이 비교적 자유로운 토론을 벌일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였다. “우산장에서 한 말은 우산장 밖으로 내가지 않는다”는 작가들의 불문율이 지금껏 어겨진 적 없다는 사실은 우산장이 작가들에게 제공한 무형적 의미를 깨닫게 해 주는 부분이다.
관련어 평안남도 남포시
동의어 우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