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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세평 [Yun Sepyong]

상세 정보 표
분야 인물별체계관리 > 문학 > 평론가
9분류 인물
집필자 남원진
출생일1911년 8월 10일
사망일미상
출생지전라북도 남원군 운봉면 북천리
정의
윤세평은 1930년대 등단한 후 비평 활동을 펼쳤으며, 해방 후 조선작가동맹 평론분과 위원장, 김일성종합대학 조선문학 강좌장 등 북한의 여러 분야에서 활동한 평론가이다.
용례/관용구
윤세평의 「18세기 실학파와 박연암의 문학」, 신구현의 「박연암의 미학 사상」, 최익한의 「정다산과 문학」, 한효의 「신경향파 작가로서의 최서해」 등은 고전적 유산에 대한 옳은 리해 우에서 씌여지고 있다. 한설야, 「발전도상에 오른 전후의 조선 문학」, 『조선문학』, 1호, 1995.
내용
윤세평(尹世平)의 본명은 윤규섭(尹圭涉)이다. 그는 1911년 8월 10일 전라북도 남원군 운봉면 북천리에서 출생하여, 전주고보를 졸업하고, 사회운동(전주여고보 사건)에 가담하여 3년간 감옥 생활을 한 바 있다. 1930년대 후반 백철의 휴머니즘론을 비판한 첫 평론 「문단항변」(『조선일보』, 1937년 4월 3일, 6월~9월)을 발표하면서 전문적인 비평 활동을 시작하며, 확고한 비평적 입장과 의식을 가지고 여러 편의 평문을 발표한다. 당대의 여러 비평가들과 문학에 대한 논전을 벌이며, 지도 비평의 입장에서 작가나 작품을 평가한 대표적인 비평가의 한 사람이다. 당시 그의 비평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것은 문학의 사상성 회복, 북한적인 특수성에 바탕을 둔 창작 방법의 확립, 지성의 행동성을 전제로 한 휴머니즘의 적극적인 수용에 있다.
해방기에 그는 완전한 자주독립국가의 건설을 주장하다가, 1946년 전 가족을 데리고 월북하며, 1946년 10월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산하 북조선문학동맹 중앙상임위원이 되며, 평론 「신민족문화수립을 위하여」(『문화전선 2』, 1946. 11)를 발표한다. 월북 이후 윤규섭은 필명을 ‘윤세평’으로 개명한다. 그는 문화 운동의 실천적 이념을 제공하는 한편, 현장 비평과 이론적 실천에 나아가며, 고전문학의 체계적인 정리 및 주해를 하며, 문학작품을 발행하는 출판사에 재직하며, 김일성종합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등 여러 분야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친다. 구체적으로, 월북 후 1948년까지 북조선인민위원회 선전국, 민주조선사 등에서 재직하며, 1949년부터 1954년까지 김일성종합대학 조선문학 강좌장을 역임하며, 그 후 조선작가동맹 평론분과 위원장, 『조선문학』 편집위원, 『문학신문』 주필 등을 거쳐 조선작가동맹출판사 단행본 주필,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회 후보위원 등으로 활동했으나, 1962년 편지 「천 세봉 형에게」(『문학신문』, 1962년 7월 20일)라는 글을 발표한 후 숙청되며, 그 이후 행적은 소상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도 윤세평의 숙청은 1961년 9월 제4차 조선로동당 대회 이후 전일적 혁명전통 수립(항일혁명문학)이라는 당 선전분야의 과제에 대해 카프 문학의 정통성을 주장한 한설야의 숙청이나 문학계 전반의 복고주의와 민족허무주의에 대한 비판과 관련된 것이 아닐까 짐작할 수밖에 없다.
관련어 복고주의, 민족허무주의, 조선문학, 문학신문, 문화전선
동의어 尹世平, 윤규섭, 尹圭涉
관련연구(남) 신재기, 「문학과 생활실천의 통일」, 『예술논문집』, 32권, 1993.
오하근, 「김환태의 인상비평과 윤규섭의 경향비평」, 『한국언어문학』, 57권, 2006.
최명표, 「인식의 비평과 비평의 인식」, 『문예연구』, 49권, 2006.
남원진, 「윤세평과 사회주의적 민족문학론의 향방」, 『통일정책연구』, 18~1권, 2009.
관련자료(북) 윤세평, 『생활과 문학』, 평양: 조선작가동맹출판사, 1961.
윤세평, 『해방전 조선 문학』, 평양: 조선작가동맹출판사, 1958.
참고자료 최명표(편), 『인식론적 비평과 문학』, 서울: 새미, 2003.
남원진, 『이야기의 힘과 근대 미달의 양식』, 광명: 경진,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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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세평

이미지명 : 윤세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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