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의 나날 [Days of Construction]
상세 정보 표
분야 |
장르별체계관리 > 문학 > 시 > 서정시 |
9분류 |
작품 |
집필자 |
최진이 |
시기 | 195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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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자 | 전초민 |
-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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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의 나날>은 1958년 중공군이 철수하면서 북한에 조성된 새 사회건설의 앙양된 분위기를 반영한 작품이다.
-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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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가 선포되고 중공군이 철수한 1958년부터 유일사상체계가 수립되는 해인 1968년까지 북한 사회는 정신의 앙양기였다. 학자들 속에서는 소련이 개입된 8.15 해방과 중국에 작전권이 양도되어 정전으로 끝난 6.25 전쟁을 반성하는 기운이 돌면서 주변 열강에 휘둘리기보다 이제는 우리 스스로 주체(후에 김일성이 자기 사상으로 각색)를 세워야 한다는 새사회 건설의 목소리가 일기 시작하였다. 1950년대 말 북한에서는 다산 정약용의 실학사상이 광범위하게 전파되기 시작하였으며, 세계문학 번역과 출판 사업이 궤도에 올랐다. 또한 사전편찬 사업이나 인텔리 우대 등과 같이 지적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작가, 시인들은 이를 반영한 작품들을 적극 창작하기도 하였다. 전초민이 1959년에 내놓은 <건설의 나날>은 그 예에 속한다.
당대 사회의 격정을 의식한 시인은 단도직입적으로 시의 도입부를 시작한다.
봄볓이 번쩍이는
저 높은 집 담벽에,
한장 벽돌을 더 얹지 못하고 보낸 날을
먼 후일 한하지 말고
동무여 오늘에 쌓자.
장장만리 저 관개수로에서
흙 한짐을 져내지 못한 것을
먼 후일 생각지 말고
동무여 오늘에 더 지자.
쇠물 끓는 용광로를 세우고,
지하 천척 광석을 캐고,
먼 바다에, 산에
우리에겐 할일도 많거니…
대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드디어 자기 힘을 의식한 북한 사람들의 눈앞에는 어디를 보나 할 일 투성이었다. 통행증제도가 없고 유일사상체계도 서지 않았던 그 시기 사람들의 사상은 자유롭고 사회는 평화로웠다. 마음껏 배우고 마음껏 일하는 것이 실제로 가능한 환경이었다. 교통 통신 수단이 철도나 전화, 우편에 의존하는 정도였지만 산골농촌청년들조차도 문예총 기관지인 『조선문학』을 정기적으로 받아 읽으며 일이 끝난 저녁이나 휴일이면 동무네 집이나 마을 선전실 등에 모여 작가와 작품에 대해 작가들 못지않은 열띤 논쟁을 벌이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 시기 문학작품의 독자로서의 인민대중은 사회에 대한 책임 의식이 강했고, 이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다 끝내지 못한 임무로 하여
공산주의 래일로 가는 길이 멀어진다면,
두 갈래로 나뉘인 조국도
그대로 남는다면?!
이 당시 사람들의 사회적 책임의식은 갈라진 ‘남녘땅’에까지 확장되어 있었다. 8.15와 6.25를 거치며 이루어진 분단 현실에 대해 시인은 현실을 회피하지 않는 태도를 보여준다. 시인은 분단 극복의 과제가 자신의 세대에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현실을 직시한다.
허나 백발은 막을 길이 없나니,
귀밑에 고이 내린 백발을 쓸어 넘기며
귀여운 손주들의 손목에 이끌려
대리석 층층계를 오를 때,
그들에게 자랑할 말이 없으면
늙음이 어찌 구슬프지 않으랴!
이 막막한 과제 앞에 번민하던 시인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왔다. 실제로 지금 할 수 있는 자신의 일을 모색하는 것, 이것만이 자신을 살게 하는 힘이었다. 그리고 비로소 시인은 붓을 이어갈 힘이 생겼다.
영원히 젊고
영원히 웃는 기적이 오늘에 있으매,
벽돌 한장
흙 한짐이 천금보다 귀하여라!
시인은 자기 혼자 힘으로는 그 조정이 불가능한 사회에서 그래도 자기 할 일을 찾아냈고, 시인이 마음을 기울여 충실히 쓴 <건설의 나날>은 시대를 반영한 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