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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영 [Kim Seyong]

상세 정보 표
분야 인물별체계관리 > 영상 > 영화 > 영화배우
9분류 인물
집필자 이명자
출생일1923년 9월 17일
사망일1989년 10월 23일
출생지충청북도 청원군
정의
북한의 코미디 전문 배우이다.
내용

충청북도 청원군 가덕면 두산리에서 출생한 김세영은 3살에 어머니를, 6살에 아버지 잃고 고생하였다. 어려서부터 노래를 좋아하였다. 삼촌 집에서 보통학교를 다닌 후 청주상업학교를 다니다 중퇴하고 사진 재료 상사의 사무원으로 취업하였다. 김세영은 청주시 문화공단을 이끌고 일본에서 활동하기도 했으며 해방 이후 서울예술극장 배우로 활동하며 박학, 유경애 등과 <장백산>을 공연하다 극우세력의 폭행에 시달리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 전쟁이 터져 인민군대에 의해 석방되어 월북하였다.
1950년 월북하여 그해 12월부터 국립영화촬영소(현 조선예술영화촬영소)의 배우로 경력을 시작한 김세영은 첫 출연작 <소년 빨찌산>(1950)을 시작으로 <또 다시 전선으로>(1952), <정찰병>(1953), <흥부전>(1963), <영원히 이 길에서>(1966), <인민을 위한 숨은 투쟁>(1968) 등의 작품에 단역으로 출연하였다. 김세영은 1960년대까지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배우였다. 월북 이전부터 친하게 지내던 배우 박학이 인민배우로 성공하고 있을 때 여전히 단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김세영은 배우를 그만둘까를 고민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때 박학이 “시시 펀펀한 얼굴에 상냥하게 보조개가 있는” 김세영의 얼굴이 찰리 채플린과 닮은 데가 있고 <보충병>(1969)에서 맡았던 희극 연기를 상기시키며 김세영에게 희극 연기를 할 것을 권유하였다고 한다. 김세영은 마침 희극영화 <자랑 끝에 있은 일>의 주인공을 고민하고 있던 감독 윤기찬의 허가를 얻어 주인공을 맡았다. 희극영화 감독으로 이름이 높았던 윤기찬은 자신이 연출한 <안해의 일터>(1970)에서 단역이긴 했지만 김세영이 남새반장 역을 통해 희극적 연기를 다분히 보여준 것을 눈여겨 보았던 터라 김세영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우울한 어린 시절의 영향으로 잘 웃지 않고 무뚝뚝한 성격이었던 김세영의 희극배우로서의 삶은 이렇게 시작되어 1973년부터 제작된 <우리집 문제>시리즈에서 우편국장 역을 맡아 본격적으로 희극배우로서 이름을 알렸다. <우리 집 문제> 외에도 <사과 딸 때>(1971), <공중무대>(1972), <유원지의 하루>(1975) <두 선장>(1982), <보람찬 우리 생활>등 경희극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코미디 전문 배우로 확고하게 자리잡으며 북한 대중들로부터 ‘자전거 반장’, ‘달리기 명수’ 등의 별명으로 불리었다. 다감하면서도 특색 있는 목소리와 광대를 닮은, 우는 듯 웃는 듯한 눈빛이 김세영의 코미디 배우로서의 장점이다. 코미디 배우로서 성공한 김세영은 인민배우 칭호와 국기훈장 제1급 등 많은 훈장과 메달을 받았다.
1985년 고향방문단에 선정되어 남한을 방문한 바 있으며 1989년 불치의 병으로 사망하여 애국열사릉에 안치되었다.
관련어 국립영화촬영소,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인민배우
관련자료(북) 김세영, 「기쁨과 웃음이 꽃펴나게 한 사랑의 품」, 『조선예술』 , 4호, 1980.
「배우소개:인민배우 김세영」, 『조선영화』 , 5호, 1986.
참고자료 「공화국의 품속에서」, 『조선영화』 , 9호, 1988.
사회과학원 편, 『문학예술대사전(DVD)』, 평양: 사회과학출판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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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영

이미지명 : 김세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