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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린까, 미하일 이와노비츠 [Mikhail Ivanovich Glinka]

상세 정보 표
분야 인물별체계관리 > 음악 > 양악 > 작곡가
9분류 인물
집필자 권오성
출생일1804년
사망일1857년
출생지러시아 스몰렌스크
정의
러시아의 작곡가이자 고전음악 창시자로 민족적 특성이 진한 선율, 조화롭고 색채적인 화성 등을 통해 러시아 민족음악의 아버지로 평가되고 있다.
내용
1804년 러시아의 스몰렌스크에서 지주인 귀족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사랑하였으며 농민들이 부르는 민요에 큰 관심을 가졌다. 1817년부터 5년동안 상트페테르부르크 사범 기숙학교에서 피아노와 바이올린, 작곡 수업을 받았으며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예술가들과 접촉하면서 음악가로 자라났다.
그는 1823년에 카프카스(코카서스)로 여행하는 과정에 그 곳 사람들의 음악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이 시기에 <나의 하프여>, <유혹하지 말아라>, <가엾은 가수>, <나는 괴롭구나 아름다운 처녀여> 등 수많은 로망스를 창작하였다. 동시에 작곡 기법에 관한 책들과 음악 문헌을 읽었다. 기숙학교에서 시인 푸시킨, 그리보예도브를 비롯한 선진적인 사람들을 알게 되고, 특히 1812년 프랑스 침략자들을 물리치는 투쟁에서 러시아인들이 발휘한 영웅적 투쟁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는 작곡가로서의 창작시야를 넓히고 기량을 더욱 연마할 목적으로 1830년~1834년 기간에 외국 여행을 하면서 음악 연구 사업에 힘썼다. 드레스덴을 거쳐 밀라노에 도착한 그는 작곡가 베르디, 도니제티, 멘델스존을 알게 되었으며 이탈리아 가극이 발전한 새로운 분위기 속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러시아식으로 작품을 창작할 것을 결심하고 1832년 9월에 이탈리아를 떠났다. 귀국 하던 중 베를린에 머무르면서 러시아 민족의 생활을 주제로 한 큰 가극을 쓸 것을 구상하였다.
이 시기에 글린까는 <로씨야 주제에 의한 기상곡>, <두개의 로씨야 민요를 주제로 한 교향 서곡>을 썼으며 널리 알려진 로망스 <참나무 잎 설레인다>도 작곡하였다. 1834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글린까는 시인이며 평론가인 쥬콥스키를 통하여 프쉬킨과 친교를 맺게 되었으며 선진적인 예술가들의 지지 밑에 러시아의 평범한 농민영웅을 형상한 가극 <이완 쑤싸닌(이반 수사닌)>을 창작하였다. 이 가극은 1613년 폴란드의 침략으로부터 러시아를 구하기 위하여 적을 유인하고 생명을 바친 농민영웅 이완 쑤싸닌을 형상한 것이었다. 이 가극은 처음에 귀족 상류계층의 압력으로 <황제에게 바친 생명>으로 그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1836년 11월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대극장에서 첫 공연을 진행하였으며 커다란 사회적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이탈리아식 가극만을 숭상하던 귀족계층들은 이것을 ‘마부의 노래’라고 비난 조소하였다.
1837년에 그는 또다시 푸시킨의 장편 서사시에 기초한 가극 <루슬란과 류드밀라>를 창작하여 1842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첫 상연을 하였다. 가극은 재치 있는 선율 전개와 관현악적 색채의 아름다운 구사 등으로 하여 작곡가의 음악적 재능을 뚜렷이 나타내었다. <이완 쑤싸닌>보다도 논의가 더 많았지만 광범한 대중은 가극을 열광적으로 대하였다. 이 작품은 외국에서 더 큰 반향을 일으켰다. 1844년에 글린까는 파리에서 진보적 계층들의 커다란 관심 속에 음악회를 가지었다. 거기서 그는 프랑스의 작곡가 베를리오즈와 친밀한 관계를 가지며 지냈다. 베를리오즈는 글린까의 작품을 지휘하였고 잡지를 통해 그를 소개하였다.
1년 후에 글린까는 스페인으로 가서 그 나라의 문화를 연구하였으며 거기서 화려한 관현악 작품 <에스파냐서곡>, 즉 <아라곤의 호따>(1845)와 <마드리드의 밤>(1848)을 창작하였다. 조국으로 돌아온 후 글린까는 자기의 걸작인 두 개의 러시아민요를 주제로 한 환상곡 <카마린스카야>(1848)와 <마드리드의 밤>제2번(1851) 그리고 수많은 로망스를 창작하였다.
1856년에는 독일에 가서 바흐의 음악을 연구하고 두 개의 푸가음악 작품을 작곡하였다. 글린까의 모든 작품들은 러시아의 민족음악을 바탕으로 하고 기초로 하여 창작되었다. 그는 언제나 음악은 대중 속에서 창조되며 작곡가는 그것을 편곡할 따름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글린까는 러시아 민족음악의 ‘아버지’로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진보적이고 민족음악적 색채때문에 글린까는 북한에서 많이 연주되는 외국의 주요 작곡가이다. 특히 <이완 쑤싸닌>과 <루슬란과 류드밀라>는 북한에서도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