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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규 [Chu Inkyu]
상세 정보 표
분야
인물별체계관리 > 영상 > 영화 > 영화배우
9분류
인물
집필자
이명자
출생일
1902년
사망일
1956년 9월
출생지
함경남도 함흥
정의
영화배우이자 영화 행정가로, 북한의 국립 영화촬영소 초대 소장을 역임했다.
내용
함경남도 함흥 출신으로 대표적인 공산당 출신 영화인이다. 주인규는 부산에 설립된 조선 키네마사의 연구생이었다. 윤백남이 독립하여 윤백남 프로덕션을 만들자, 나운규, 남궁운, 이경손 등과 함께 옮겨갔다. 윤백남 프로덕션에서 주인규는 이경손 감독의 <개척자>를 통해 주연으로 데뷔하였다. 이후 <풍운아>, <아리랑>, <뿔 빠진 황소>, <낙원을 찾는 무리들>,<도적 놈> 등 경향파 계열 영화에 출연하였다. 이 시기 주인규는 악역으로 일인자였다고 한다.
1931년부터 함흥으로 내려와 공산주의 노동운동을 하며 흥남 질소비료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던 주인규는 황운의 첫 작품 <딱한 사람들>에 출연하였다. 이 작품은 ‘불합리한 해고로 인해 생긴 실업자들의 실생활’을 그린 작품으로 흥남질소비료회사를 배경으로 한 영화이다.
주인규는 함흥지역 공산주의 운동에서 중요한 인물이었다. 1931년 10월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프로핀테른 연락부로 가서 범태평양 노동조합의 ‘10월 서신’을 받아왔다. 이후, ‘제2차 태평양 노동조합(太勞) 사건’으로 동생 주선규와 함께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1934년 10월 함흥 지법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에는 고려극단이라는 이동극단을 조직해 국내와 만주에서 순회공연을 하였다. 친일 영화로 알려진 <복지만리>(1941)와 <망루의 결사대>(1943) 등의 영화에 출연하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조선공산당 함남도당 검찰부장을 역임하였다. 1946년 소련군정에 의해 조선민주당의 오영진을 대신하는 영화 담당자로 내정되어 북조선영화사 설립을 추진했다. 1946년 9월 북예맹 산하 영화부로 출발한 북조선 영화동맹의 중앙위원, 상임위원장이자 상임위원이었으며 1947년 2월 북조선인민위원회가 결정한 영화촬영소 건설 사업을 담당했고, 이후 국립영화촬영소의 소장이 되었다. 영화제작과 배급에 관여했던 주인규는 1946년 12월 명목상 사영으로 운영되던 인민영화사와 영화보급협회가 통합한 북조선극장위원회의 위원장도 맡았다.
주인규는 공산당 출신의 영화인으로 배우이자 북한의 영화건설 초기에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 행정가로 평가할 수 있다.
관련자료(북)
주인규, 「지난 1년간의 국립영화촬영소 사업을 회고하면서」, 『조선문학』, 3권1호, 1950.
참고자료
강만길·성대경 공편, 『한국 사회주의 인명사전』, 서울: 창작과비평사, 1996.
<한국영상자료원 데이터베이스>, http://www.kmdb.or.kr, 검색일: 2015.01.14.
이미지
주인규
이미지명 : 주인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