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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기영 [An Kiyong]
상세 정보 표
분야
인물별체계관리 > 음악 > 양악 > 작곡가
9분류
인물
집필자
노동은
출생일
1900년 1월 9일
사망일
1980년 8월 2일
출생지
충남 정산군 적곡면 적곡리
정의
1930년대부터 활동한 명테너이자 민족적인 작곡가이고 또한 음악교육가이다.
내용
공주 영명학교에서 오례택과 서울 배재학당에서 김인식 교원에게 창가와 코넷을 배웠으며, 연희전문학교에서 김영환에게 성악을 배웠다. 1919년 3.1운동과 함께 만세연호사건으로 신흥무관학교 등지에 있다가 1923년에 귀국, 1925년에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 시에 있는 엘리슨화이트음악학교에 유학하였다. 1928년 6월에 귀국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 교원이면서, <그리운 강남> 작곡했고, 이후 한국의 대표적 테너로 활동하였다. 1929년에 『안기영작곡집』 제1집 발표, 1930년 이화여전 교내 합창단인 글리클럽을 조직하여 작품 <도라지>, <방아타령> 등 한국민요를 발표했다. 1931년 발표한 소논문 「조선민요와 그 악보화」 등을 통해 선율의 민요화와 화성화를 꾀함으로써 한국 음악의 방향을 설정하는 작곡활동을 하였다. 1931년에 『조선민요합창곡집』, 『한국민요집』(콜롬비아레코드), 『안기영작곡집』 제2집을 펴냈다(제3집은 1936년). 1938년부터 경성음악전문학원 교원이었다. 1941년부터 조선가극으로 <콩쥐팥쥐>(1941), <견우직녀>(1942), <에밀레종>(1943), <은하수>(1943), <장화홍련전> 등을 반도가극단과 함께 발표하였다. 1945년 해방과 함께 조선음악건설본부 성악부 위원장, 조선음악가동맹 부위원장,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50년 6.25 전쟁 직전에 월북한 안기영은 평양의 국립예술극장 작곡가, 1951년부터 평양음악학교 성악교원으로 있으면서 『성악교측본』, 『발성교본』, 『시창교본』 등을 저술하고 20여 편의 동요와 합창곡 및 기악곡을 창작하였다. 1956년 8월부터 국립음악학교 부교수를 역임했다. 조선음악가동맹 중앙위원회 위원 및 상무위원을 지냈으며, 그리고 퇴임후 생애 마지막을 평양음악무용대학(현 김원균명칭 평양음악대학) 음악연구소에서 보냈다.
관련어
안기영작곡집
,
국립예술극장
,
평양음악학교
,
평양음악무용대학
관련연구(남)
전정임, 「작곡가 안기영의 향토가극연구」, 『음악과 민족』, 제30호, 2005.
관련자료(북)
장영철 편, 「민족가요의 현대적 발전에 기여한 작곡가이며 성악가인 안기영」, 『조선음악명인전 2』, 2000.
이미지
안기영
안기영
이미지명 : 안기영
이미지명 : 안기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