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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 [Choe Sunghui]

최승희
상세 정보 표
분야 인물별체계관리 > 공연 > 무용가
9분류 인물
집필자 한경자
출생일1911년 11월 24일
사망일1969년 8월 8일
출생지강원도 홍천 남면 제곡리
정의
남북한에서 신무용의 도입과 전개, 기본체계 정립에 독보적인 업적을 남기는 한편, 한국, 일본, 중국의 민속 무용을 작품 창작에 활용함으로써 동양무용의 체계를 구축하고자 했던 세계적인 무용가이다.
내용
정승판서를 지낸 해주최씨 명문가에서 1911년 최준현의 4남매중 막내로 태어났다(출생설에 관해 1. 강원도 홍천 출생설, 2. 서울 출생설, 3. 황해도 해주 출생설(해주최씨를 근거로 와전 추정)이 있으나 2006년 함광복(신한민보 1938년 2월 3일자 근거)에 의해 홍천 출생이 밝혀진 바 있다. 해주최씨 가계보에서 고향마을 홍천 남면 제곡리로 기록함에 근거하였다). 숙명여학교 시절 음악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남들보다 일찍 학교 과정을 마치고 진로를 고민하던 중 1926년 오빠 최승일을 따라 경성공회당에서 일본인 현대무용가 이시이바쿠(石井漠)의 무용발표회 관람을 계기로 무용에 입문하였다. 같은 해 일본으로 건너가 이시이바쿠무용연구소에 입문하여, 1927년과 1928년 이시이바쿠와 경성공연을 함께 하며 <세레나데>를 발표하였다. 1929년 귀국하여 서울에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열고 1930년부터 1932년까지 다섯 차례의 신작무용발표회를 가지면서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가 안막과 혼인하였으나 경제적 어려움으로 1933년 이시이 문하로 재입문하였다. 이를 계기로 <에헤야노아라>와 같은 조선의 전통을 소재로 현대무용의 형식을 접목한 신무용 작품에 대한 호평을 얻어 평단과 언론의 각광을 받게 되었다. <검무>, <초립동>, <장구춤>, <산조> 등이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최승희는 1927년~1964년 무용 활동기간 중 2,500~3,000회에 이르는 공연 횟수와 310편 이상의 작품을 창작하였다. 그 가운데 한국무용이 120여 편을 차지하며, 현대무용, 일본무용, 중국무용, 동양무용 등의 작품성향을 나타낸다. 최승희의 왕성한 무용활동의 배경에는 오빠 최승일과 남편 안막을 비롯한 문학과 예술방면의 주변 환경을 포함하여 ‘최승희 2회 신작발표회’를 기점으로 형성된 후원단체인 백십자회(白十字會)의 활동이 획기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백십자회의 후원과 안막의 기획력, 최승희의 예술적 재능이 합쳐져 1938년에서 1940년 까지 미국, 유럽, 남미 순회공연에서 ‘코리안댄서’를 전면에 표방하여 <보살춤>, <초립동>, <에헤야노아라> 등의 한국무용 작품에 대한 호평을 이끌어냈다. 프랑스 <피가로>지에 “선이 아주 환상적인 동양 최고의 무희”라는 격찬과 함께 관람객인 피카소, 장콕도, 로망롤랑 등의 예술가들을 매료시켰다. 1938년 세계무용경연대회에서는 마리 뷔그만(Mary Wigman), 루돌프 폰 라반(Rudolf von Laban)등과 함께 심사위원에 위촉되었다. 2차대전의 발발로 순회공연은 중단되고, 1945년 해방을 맞을 때까지 군부 위문공연에 동원됨으로서 후일 친일의 논란에 휩싸이기도 하였으나 무용작품에 친일을 표방한 직접적 작품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위문공연 기간중 중국에 머물며 메이란팡 등과 교류하며 중국 경극무용의 체계를 정립하고 베이징에 최승희동방무도연구소를 개설하여 동양무용 확립을 위한 중국무용 환경 발전에 공헌하였다.
최승희는 1946년 남편을 따라 월북하여 김일성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평양 대동강변에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세우고 무용극 <춘향전>, <반야월성곡>과 <해방의 노래> 등을 발표하고 무용 동맹위원장을 역임하였으며, 1953년에는 평양의 연구소가 국립최승희무용연구소로 승격되었다. 무용극 <사도성의 이야기>, <맑은 하늘아래>, <조선의 어머니> 등을 공연하면서 인민배우가 되었고, 최승희 무용생활 30주년 기념공연과 미술전람회 개최 등의 최고의 대우를 제공받았다. 제1급 국기훈장을 받았으나 1958년 남편 안막이 숙청되고 국립최승희무용연구소가 폐쇄되면서 무용계로부터 제거되었다. 1958년 『조선민족무용기본』이 출간되고 1962년 영화화 되었으며, 1964년 『조선아동무용기본』 출간과 「조선 무용동작과 그 기법의 우수성 및 민족적 특색」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는 등 무용교육의 체계정립에 노력하였으나 1967년 숙청되었다.
최승희는 북한에서 공훈배우, 인민배우의 칭호를 받고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됨으로서 최고의 무용가로 인정받았으나 숙청을 당하면서 불행한 최후를 맞았다. 김일성 사후 김정일에 의해 재평가되고 완전 복권되어 2003년 2월로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남한에서도 1990년대를 전후해 월북예술인들에 대한 재평가 작업과 함께 1999년 ‘20세기를 빛낸 예술인’에 선정되었고, 2011년 탄생 100주년 기념 연구 등 업적연구가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최승희는 남북한에서 신무용의 도입과 전개, 기본체계정립에 독보적인 업적을 남기는 한편 한국, 일본, 중국 등의 민속무용을 작품 창작에 활용함으로서 동양무용의 체계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현재 북한에 10만 명의 인원을 동원하는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을 제작하기 위한 집단 안무체계의 토대도 최승희로부터 비롯되었다.
관련어 인민배우, 공훈배우, 안성희
관련연구(남) 이영란, 「최승희 무용의 사상적 근원 연구」, 박사학위논문, 숙명여자대학교, 2011.
한경자, 「최승희 연구의 현황과 과제」, 『한국체육사학회지』제17권 1호, 2012.
유현진, 「최승희의 무용 예술행적과 본질에 관한 연구」, 석사학위논문, 한양대학교, 2003.
관련자료(북) 사회과학원 편, 『문학예술대사전(DVD)』, 평양: 사회과학출판사, 2006.
참고자료 김채원, 『최승희춤』, 서울: 민속원, 2008.
사회과학원 편, 『문학예술대사전(DVD)』, 평양: 사회과학출판사, 2006.
해주최씨대종회홍보위원회, 『수양열전』, 서울: 도서출판 신정, 2008.
정병호, 『춤추는 최승희』, 서울: 현대미학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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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

이미지명 : 최승희

최승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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