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검색 결과 바로가기
HOME > 디렉토리 서비스 > 가나다색인
이전 다음 A+ A- 인쇄

한상익 [Han Sangik]

상세 정보 표
분야 인물별체계관리 > 미술 > 작가 > 회화 > 유화
9분류 인물
집필자 박계리
출생일1917년 9월 2일
사망일1997년 10월 22일
출생지함경남도 함주군 주서리
정의
한상익은 색채와 현상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를 통해 ‘조선적인 유화’를 창작했다.
내용
1936년 함흥 공립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대구사범학교 강습과를 1년 수료한 뒤 1939년 동경미술학교 유화과에 입학하였다. 1943년 귀국하여 그림을 그려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수상하였다. 해방 후 고향 함흥에서 조선미술가동맹에 소속되어 작품 활동을 하였다. 1950년 4월부터 평양미술대학의 교수로서 1955년 9월까지 미술 교육에 힘썼다. 1955년 말부터 1971년까지 조선미술가동맹 함경남도, 강원도 위원회에서 창작을 이어나갔다. 한상익은 새로운 창작 시도로 화단에 물의를 빚은 것을 계기로 1971년부터 1984년까지 통천군의 현장 등에서 창작활동을 하였다. 이후 한상익은 사망할 때까지 강원도미술창작사에서 활동하였다.
한상익은 1943년 귀국하여 그린 유화 <부엌에서>로 1944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고, <추의작>으로 특선을 수상하였다. 1947년 유화 <단강도>(200호)로 문학예술상 2등을 수상하고 김일성표창장을 받았다. 1954년작 유화 <고지이야기>로 문학예술상 1등을 수상하였다. 그러나 동경미술학교 시절부터 이어온 한상익의 현상과 색채에 대한 관심은 1960년대 북한 화단으로부터 주제 내용보다 형식적 측면을 중시한 주관주의로 나아갔다고 비판을 받기 시작하였다. 한상익은 이에 대해 창작적 개성의 문제, 조형적 형상과 형식 문제에서 새로운 시도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미술계에 물의를 일으켰다. 이후 한상익은 평양미술대학을 떠나 홍성군 고저수산사업소, 고산군 광영공예품공장 등지에서 일하면서 창작활동을 지속하게 되었다. 현지에서 사생을 통한 작품 창작을 1984년까지 약 14년간 지속하였고 그 중 200여 점에 달하는 금강산과 명산을 그린 작품들은 비로소 그의 색채와 조형에 대한 탐구를 보여준다. 이후 1990년대 북한 미술계의 사의적인 풍경화들을 포용하는 흐름 속에서 1991년 김일성이 한상익의 유화 <국화>(1978)에 대하여 ‘조선적인 유화’로 높게 평가한다. 이러한 재평가에 힘입어 한상익은 1992년 국제문화회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하여 그의 복권된 위상을 확인시켜주었다. 개인전에 전시된 200여 점이 넘는 한상익의 작품들은 색채미와 섬세한 필치에 대하여 찬사를 받았다.
관련어 평양미술대학
관련연구(남) 박계리, 「박계리의 스케치北 (24), 한상익, 강렬한 색채로 옮긴 삼천리 금수강산」, 『통일한국』, 360호, 2013.
관련자료(북) 리재현, 『조선력대미술가편람』, 평양: 문학예술종합출판사, 1999.
참고자료 리재현, 『조선력대미술가편람』, 평양: 문학예술종합출판사, 1999.

이미지

한상익

이미지명 : 한상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