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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방문단 [Soviet visiting gro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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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장르별체계관리 > 이론-공통 > 이론 > 조직
9분류
조직
집필자
박태상
정의
1차 소련방문단은 조소친선협회 중앙위원회 위원장 이기영이 북한의 농민, 노동자, 학자, 정치가, 예술가 등 25명을 인솔하여 1946년 8월 10일 평양을 출발하여 10월 17일까지 70일간 모스크바 대외문화협회 초청으로 소련과 조선 간의 친선과 문화교류를 위해 소련을 방문했다.
용례/관용구
옛날부터 이 꿈나라를 동경해왔는데, 비행기를 타고 이 꿈나라의 서울 모스크바로 날아왔다. 리기영, 『기행문집』, 1960.
규모와 구성
조소친선협회는 1946년 설립되었고 이기영은 1946년부터 1982년까지 35년간 조소친선협회 중앙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여러 차례 소련방문단을 이끌고 소련을 친선방문했다.
대체로 소련방문단은 농민, 노동자, 학자, 정치가, 예술가 등 북한 인민 각 계층을 망라한 25명 규모로 구성되었으며, 1946년의 첫 방문에서는 소련의 여행 안내자로 소련군 풀소프 소장과 강 소좌 2명이 포함되어 총 27명으로 구성되었다.
내용
북한의 김일성정권이 소련방문단을 구성하여 인민 대표를 소련에 파견한 목적은 형식적으로는 소련과 조선 간의 친선과 문화교류를 위한 것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실상은 냉전시대에 있어서 소련과 미국은 양강 체제를 구축하고 있었고, 소련은 사회주의 국가의 선도적인 나라였으므로 소련의 선진문화와 기술을 배움으로써 그것을 북한의 초기 사회주의의 발전모델로 삼으려는 주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북한의 소련방문단은 김일성이 중소 등거리 외교를 펼치기 전까지 여러 차례 추진되었다. 이기영의 『기행문집』을 보면, 조소친선협회 중앙위원회 위원장 이기영은 1946년부터 1954년까지 총 4차례나 소련방문단을 이끌고 모스크바를 방문한 것으로 나타난다. 1946년의 제1차 소련 방문의 목적은 소련과 조선 간의 친선과 문화교류에 있었다. 1949년의 제2차 소련방문단은 이기영 혼자만 초청받은 것으로 나타나는데, 방문 목적은 소련 최고의 시인인 푸시킨 탄생 150주년 기념축전에 조선을 대표하여 축하사절로 참석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하지만 김일성의 특별한 지시를 받고 방문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이기영이 방문목적과 달리 문화관련 기관보다는 콜호스의 ‘분조관리제’, 뜨락또르공장, 지하철도 노동자 문화회관, 농업과학원 시험농장의 자연개조 계획, 소련의 ‘스타하노프운동’ 등을 세심하게 둘러본 것에서 확인이 된다.
이기영의 소련방문 일정을 보면, 평양에서 기차를 타고 청진으로 가서 다시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톡으로 간 것으로 묘사된다. 그곳에서 비행기를 타고 하바로프스키, 망다가시, 이르쿠츠크 등을 경유한 후 이르쿠츠크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5시간을 비행하여 노보시빌스크, 옴스크, 스웰드로프스크를 거쳐 최종목적지 모스크바에 도달한다. 이기영은 소련주재 북한대사관에서 리주연 대사를 만나고, 1만 명 수용의 고리키공원을 방문한 후 푸시킨 탄생 150주년 기념 축전에 참석하는 동시에 안데르센 넥세의 80주년 탄생 축하야회에도 참석하여 소련작가동맹위원장 파제예브, 칠레의 혁명시인 파블로 네루다, 소련의 계관시인 미하일꼬프 등을 만난다. 이어서 스탈린그라드, 우크라이나공화국, 우랄의 대도시 스웨르드로프스크를 방문하고 모스크바로 와서 레닌박물관, 그녜시네 음악대학원, 무용대학, 지하철도 노동자문화회관 등을 방문한다. 특히 뜨락또르 공장 견학에서 노동자의 고상한 인간전형을 발견하게 된다. 하루 75대의 뜨락또르 생산과정을 둘러보면서 스타하노프 운동자인 노동자와 기술자들이 70%를 차지하고 있는 가운데 5개년 계획을 이미 달성한 사람이 많으며 10개년 계획목표를 3년 만에 초과달성하는 것을 목격하기도 한다.
이기영은 우크라이나공화국 수도 키예프에서 『외과의 크레체트』의 작가 코르네이추크를 만나고, 농노 출신 화가,시인인 쉽첸코박물관을 둘러보고 와실렙 콜호즈와 붉은 빨치산 콜호즈를 방문해서 감동을 받는다. 토마토를 1년에 두 번 수확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는 점과 감자꽃에서 씨를 얻어 심는 방법을 개발하여 감자눈을 따서 심는 방법보다 10배 이상의 수확을 올리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는 것을 보고 큰 영향을 받는다. 붉은 빨치산 콜호즈에서는 기계화된 농장건축계획을 듣고, 70 ~ 80명이 소속된 작업반 13개의 ‘분조관리제’에 대한 조직관리방법을 배우게 된다.
1952년의 제3차 소련방문단을 이끌고 간 이기영의 방문목적은 고골리 서거 100주년 기념제전에 조선대표로서 참석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모스크바의 가로수가 울창해진 것과 자동차가 많이 증가한 것 등 그동안 소련의 전변에 놀라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스탈린에 의한 4차 5개년 계획의 초과 달성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고골리동상 제막식에 참석하고 고리키대극장을 둘러본 후 산원(산부인과 병원)을 견학하고 붉은 10월 공장의 기술회관과 3.18공구 제작소를 방문한다. 제3차 소련방문단의 특징은 북한으로부터 전보를 받은 이기영 일행이 노르웨이 오슬로 평화회의 확대이사회에 소련 대표 파제예프, 에렌부르그, 코르네이추크, 중국 대표 곽말약, 모둔 등과 함께 조선 대표로 참가해서 주로 세균무기 사용에 대한 반대토론에 참여했다는 점이다. 본회의에서 “5대 강국 평화조약 체결운동, 독일 ․ 일본의 재무장 반대운동, 독일 부근의 인접국가에서의 이 운동의 강력화와 윈나 회의 결정을 계속 진행할 것, 전 세계 학자들에게 편지를 보낼 것과 미제의 세균무기 사용에 대한 재료를 수집 출판하여 전 세계 인민에게 널리 선전할 것” 등을 결정했다고 전한다.
1953년 10월의 제4차 소련방문 목적은 소련 대외 문화협회 초청으로 사회주의 10월 혁명 36주년 기념보고대회에 참가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는 매우 예민한 때였다. 한국전쟁이 폐허상태에서 끝났으며 혈맹 소련 또한 스탈린의 사망으로 혼돈 상태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방문 대표단장인 이기영은 소련 체류 기간 동안 개인적으로 큰 기쁨을 맛보게 되는데, 자신의 장편소설 <땅>이 러시아어로 번역되었기 때문이다. 이기영 일행은 레닌과 스탈린 묘소를 참배하고 '사회주의 10월 혁명 36주년 기념보고대회'에 참석하고 붉은 광장에서 거행되는 경축대회에 참가하였다.
그 다음날부터 건설박물관을 방문하여 조립식 주택건설사업에 대한 견학을 하고 고리키 자동차공장과 제지공장을 둘러보았으며 농업대학과 시외의 콜호즈를 찾아가 농촌경리사업과 농업기계화사업을 참관하였다. 소련방문단은 에르미타쥬 미술박물관을 방문하여 소련예술의 위대함을 발견하고 특히 레닌그라드의 전연맹직업동맹 중앙위원회의 ‘노동보호연구소’에서 노동자들의 안전노동과 생산기술 향상을 위해 공기의 보온장치와 공기전화시설 연구 등 과학적인 연구사업을 펼치는 것에 큰 감명을 받게 된다.
그곳의 공업 통풍부에는 두 개의 실험실이 있었는데, 하나는 공기의 보온장치를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공기를 정화하는 기계가 설치되어 있었다. 빠른 속도로 기계화되어 가는 소비에트 공업에 있어서 공장의 길이는 1Km 이상 되는 곳에서도 노동자의 수효는 극히 적었다. 그만큼 생산의 기계화, 자동화가 급속히 발전되고 모든 중노동을 기계들이 대신하게 되어 사람의 노력을 크게 감소시킨 때문이었다. 이러한 공장의 온도는 상당히 높은 데도 불구하고 신선한 공기를 보내주어서 환기장치를 잘해주면 그들의 노동을 완전히 보호할 수 있어서 실내의 공기 중에서 먼지를 빼내고 온도와 습기를 적당히 조절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기영을 비롯한 소련방문단이 감동한 것은 “참으로 노동자를 위하여 이러한 국가적 배려를 돌리는 나라가 이 세상에 또 있는가? 이것은 오직 위대한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에서만 볼 수 있는 국가적 시설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소련방문단의 견학은 새로운 사회주의 국가건설이라는 목표로 움직이고 있던 해방 이후의 북한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몇 가지 사례만 보더라도 이기영이 『기행문집』의 도처에서 강조하고 있는 소련의 ‘스타하노프 운동’을 밑거름으로 노력영웅을 만들어내고 그들을 통해 각종 공장에서 증산운동과 절약운동을 펼쳐나가고 있는 것은 북한의 김일성에 의해 도입되어 ‘천리마운동’으로 활용된다. 또 ‘스탈린식 계획경제’를 통해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폐허상태의 도시와 농촌이 ‘눈부신 전변’을 하게 된 점도 북한에서의 계획경제 도입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기영은 그 외에도 지하철도 노동자 문화회관을 방문해서 ‘과학지식’, ‘정치이론’, ‘문화사업’의 세 가지 방향에서 노동자를 교육하는 것을 목격하는데, 이 모델은 북한의 김정일의 등장 후 강력한 대중노선으로 진행했던 기술혁명, 사상혁명, 문화혁명의 '3대 혁명 소조운동'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그 외에도 콜호즈를 견학하고 터득한 소련협동농장의 ‘작업반 분조관리제’와 ‘자연개조계획’의 원대한 이상 전개과정의 교훈은 한국전쟁으로 폐허상태에 이르렀던 북한의 공산주의 사회건설과 전후 인민경제의 복구건설에 중요한 바로미터가 된다.
소련방문단은 선진문화를 도입하여 북한사회를 개조하는 데 큰 기여를 했지만 커다란 문제점도 낳게 된다. 바로 스탈린식 독재정치의 모방이 가져온 공포정치의 답습과 자율성 없는 획일성이 가져다준 폐해는 세계에 유례가 없는 ‘3대 권력세습’이라는 모순을 낳으며 북한인민들을 궁핍으로 몰아가게 된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
대응어
조소친선협회
,
조소문화협회
관련연구(남)
박태상, 「새로 발견된 이기영의 ‘기행문집’ 연구」, 서울, 『북한문학의동향』, 깊은샘, 2002.
참고자료
박태상, 「새로 발견된 이기영의 ‘기행문집’ 연구」, 서울, 『북한문학의동향』, 깊은샘,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