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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조선작가대회 [secondary meeting of Korean writers ]
상세 정보 표
분야
장르별체계관리 > 문학
9분류
행사
집필자
오성호
시기
1956년 10월 14일 ~ 1956년 10월 16일
개최장소
평양
정의
제2차 조선작가대회는 전후복구 이후 문한 노선의 정비를 위해 열린 대회이다.
정의
제2차 조선작가대회는 전후복구 이후 관료중, 도식주의 편향에 빠진 문단 노선의 정비를 위해 열린 대회이다.
용례/관용구
제2차 조선작가대회에 한 한설야 위원장의 보고
용례/관용구
제2차 조선작가대회에 한 한설야 위원장의 보고
내용
1953년 9월에 열린 제1차 작가예술가대회 이후에 북한 평단에서 나타난 전후 복구건설을 완료하고 난 뒤 새로운 문학 노선을 제시하는 한편,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와 제2차 소련작가대회에서 나타난 소련의 정치, 문화적 변화와 관련하여 북한 문단의 입장을 정리하기 위해 열렸다.
제2차 조선작가대회는 제1차 전국작가예술가대회에 이어서 3년 만에 열린 대회로, 공식적으로는 “쏘련 공산당 제20차 대회와 조선 로동당 제3차 대회의 정신에 입각하여” 개최된 것으로 천명되었다. 그것은 이 대회가 스탈린 사망(1953) 이후 개최된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1956.2.)에서 나타난 공산당 노선 변화와 스탈린 시대의 ‘개인숭배’ 비판, 그리고 제2차 소련작가대회(1954.12.)에서 제기된 도식주의 경향 및 문학예술에 대한 관료적 통제에 대한 비판과 관련하여 북한 나름의 입장 정리를 위해서 열렸음을 시사한다. 이와 함께 북한 내부적으로도 전후 복구건설이 완료된 이후 문단에서 나타난 논쟁(그중 대표적인 것은 무갈등론을 둘러싼 논쟁이라고 할 수 있다)들과 관련하여 문학 노선의 정비가 필요했던 것도 이 대회가 열린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대회는 문학예술에서 나타난 ‘독단주의’를 비판한 북문예총 위원장 한설야의 보고 이후 창작에 나타난 도식주의 경향과 문학에 대한 관료적, 행정적 통제 등을 비판하는 개별 작가 시인들의 발표와 토론으로 진행되었다. 한설야의 보고에서 주목되는 것은, 제1차 작가예술가 대회에서 강조했던 당성이나 사상성, 혁명적 로만찌카 등을 대신해서 생활의 진실을 그리라는 요구를 제시했다는 사실이다. 이어서 그는 의식적 과장이나 인물의 이상화, 문학에 대한 관료적 통제, 평론의 횡포 등에 대해서도 신랄한 비판을 제기했다. 이런 분위기는 1954년 말에 열렸던 제2차 소련작가대회에서 논의된 내용들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소련의 작가대회가 무갈등이론이나 혁명적 낭만주의의 문제 같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기본 원칙에 대한 문제 제기에까지 나아간 반면 한설야는 주로 도식주의와 문학에 대한 행정적, 관료적 통제를 비판하는 선에 머물렀다. 아울러 그는 모든 문제가 ‘독단주의’에서 비롯된 것으로 진단하면서 도식주의와 관련해서는 ‘생활을 깊이 연구하라’는 처방을, 문학에 대한 행정적·관료적 통제와 관련해서는 작품에 대한 합평회 방식의 개선, 즉 출판 전 합평회에서 출판 후 합평회로의 전환이라는 처방을 제시하는 것으로 발표를 마쳤다.
이 대회에 대한 북한의 공식적인 평가는 “문학예술에서 레닌적 당성 원칙”이 강화되었고 “사회주의 사실주의 창작방법”을 확고히 할 것을 제기함으로써 “국제 수정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타격을 가했다”는 것이다. 이 대회 이후 일시적으로나마 창작의 자율성이 신장되고 구체적인 창작의 성과를 가져왔다는 것은 작가나 시인들도 인정하는 바였다. 하지만 1956년 12월에 ‘천리마운동’이 발기되면서 공산주의 교양을 강화하기 위한 문예의 역할과 사상의 선도성이 더욱 강조되었고, 이에 따라 문학에 대한 당의 지도와 통제 또한 강화되었다. 이는 결국 일시적으로 신장되는 듯이 보였던 창작의 자유가 다시 제한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이 대회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던 김순석, 서만일 등의 작품이 채 2년도 지나지 않아 부르주아적인 것으로 매도되었던 것이 이를 말해 준다. 따라서 이 대회의 성과에 대한 북한의 공식적인 입장과 평가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특히 한설야는 개인숭배를 인물의 이상화와 동일시함으로써 자신이 발표 첫머리에서 강조했던 ‘소련공산당 20차 대회의 정신’을 결정적으로 왜곡했다. 하지만 그것은 한설야의 개인적인 견해라기보다 조선로동당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 대회에 앞서 열린 조선로동당 3차 대회에서 이미 ‘개인숭배’는 일부 종파분자들의 독단에서 비롯된 과오일 뿐 조선 로동당은 결코 집체지도의 원칙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는 결론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이는 북한이 소련이 당부한 개인숭배 자제에 대한 요구를 슬쩍 비껴갔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한설야는 이런 조선로동당의 입장을 대변한 것이다. 이는 적어도 문예 분야에 있어서, 그리고 개인숭배 문제에 있어서 이미 북한이 소련과 거리두기를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이 대회가 김일성 유일체제가 확립된 이후, 그리고 전후복구건설의 승리를 바탕으로 천리마운동의 발기를 앞둔 시점이었다는 점은 이 대회에 대한 북한의 공식적인 평가와 대회 직후에 나타난 조치들을 신뢰하기 어렵게 만든다. 유일체제의 강화와 천리마운동의 발기를 앞둔 시점에서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은 작가예술가들의 ‘사상의 고삐’를 다시 죄는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회가 끝난 뒤 일 년이 지나기도 전에 현실로 나타났다. 대회석상에서 한설야가 고평했던 시인이나 작가들에 대한 가혹한 비판이 제기된 것이다. 그것은 작가예술가들에 대한 ‘사상의 고삐’가 다시금 죄여졌음을 의미한다.
내용
제1차 작가예술가대회(1953년) 이후에 북한 평단에서 나타난 전후 복구건설을 완료하고 난 뒤 새로운 문학 노선을 제시하는 한편,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와 제2차 소련작가대회에서 나타난 소련의 정치, 문화적 변화와 관련하여 북한 문단의 입장을 정리하기 위해 열렸다.
1953년 9월에 열린 제1차 전국작가예술가대회에 이어서 3년 만에 열린 대회로, 공식적으로는 “쏘련 공산당 제20차 대회와 조선 로동당 제3차 대회의 정신에 입각하여” 개최된 것으로 천명되었다. 그것은 이 대회가 스탈린 사망(1953) 이후 개최된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1956.2)에서 나타난 공산당 노선 변화와 스탈린 시대의 ‘개인숭배’ 비판, 그리고 제2차 소련작가대회(1954.12)에서 제기된 도식주의 경향 및 문학예술에 대한 관료적 통제에 대한 비판과 관련하여 북한 나름으로 입장 정리를 위해서 열렸음을 시사한다. 이와 함께 북한 내부적으로도 전후 복구건설이 완료된 이후 문단에서 나타난 논쟁(그중 대표적인 것은 무갈등론을 둘러싼 논쟁이라고 할 수 있다)들과 관련하여 문학 노선의 정비가 필요했던 것도 이 대회가 열린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대회는 문학예술에서 나타난 ‘독단주의’를 비판한 북문예총 위원장 한설야의 보고 이후 창작에 나타난 도식주의 경향과 문학에 대한 관료적, 행정적 통제 등을 비판하는 개별 작가 시인들의 발표와 토론으로 진행되었다. 한설야의 보고에서 주목되는 것은, 제1차 작가예술가 대회에서 강조했던 당성이나 사상성, 혁명적 로만찌카 등을 대신해서 생활의 진실을 그리라는 요구를 제시했다는 사실이다. 이어서 그는 의식적 과장이나 인물의 이상화, 문학에 대한 관료적 통제, 평론의 횡포 등에 대해서도 신랄한 비판을 제기했다. 이런 분위기는 1954년 말에 열렸던 제 2차 소련작가대회에서 논의된 내용들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소련의 작가대회가 무갈등이론이나 혁명적 낭만주의의 문제 같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기본 원칙에 대한 문제 제기에까지 나아간 반면 한설야는 주로 도식주의와 문학에 대한 행정적, 관료적 통제를 비판하는 선에 머물렀다. 아울러 그는 모든 문제가 ‘독단주의’에서 비롯된 것으로 진단하면서 도식주의와 관련해서는 ‘생활을 깊이 연구하라’는 처방을, 문학에 대한 행정적·관료적 통제와 관련해서는 작품에 대한 합평회 방식의 개선, 즉 출판 전 합평회에서 출판 후 합평회로의 전환이라는 처방을 제시하는 것으로 발표를 마쳤다.
이 대회에 대한 북한의 공식적인 평가는 “문학예술에서 레닌적 당성 원칙”이 강화되었고 “사회주의 사실주의 창작방법”을 확고히 할 것을 제기함으로써 “국제 수정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타격을 가했다”는 것이다. 이 대회 이후 일시적으로나마 창작의 자율성이 신장되고 구체적인 창작의 성과를 가져왔다는 것은 작가나 시인들도 인정하는 바였다. 하지만 1956년 12월에 ‘천리마운동’이 발기되면서 공산주의 교양을 강화하기 위한 문예의 역할과 사상의 선도성이 더욱 강조되었고, 이에 따라 문학에 대한 당의 지도와 통제 또한 강화되었다. 이는 결국 일시적으로 신장되는 듯이 보였던 창작의 자유가 다시 제한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이 대회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던 김순석, 서만일 등의 작품이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부르주아적인 것으로 매도되었던 것이 이를 말해 준다. 따라서 이 대회의 성과에 대한 북한의 공식적인 입장과 평가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특히 한설야는 개인숭배를 인물의 이상화와 동일시함으로써 자신이 발표 첫머리에서 강조했던 ‘소련공산당 20차 대회의 정신’을 결정적으로 왜곡했다. 하지만 그것은 한설야의 개인적인 견해라기보다 조선로동당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 대회에 앞서 열린 조선로동당 3차 대회에서 이미 ‘개인숭배’는 일부 종파분자들의 독단에서 비롯된 과오일 뿐 조선 로동당은 결코 집체지도의 원칙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는 결론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이는 북한이 소련이 당부한 개인숭배 자제에 대한 요구를 슬쩍 비켜갔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한설야는 이런 조선로동당의 입장을 대변한 것이다. 이는 적어도 문예 분야에 있어서, 그리고 개인숭배 문제에 있어서 이미 북한이 소련과 거리두기를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이 대회가 김일성 유일체제가 확립된 이후, 그리고 전후복구건설의 승리를 바탕으로 천리마운동의 발기를 앞둔 시점이었다는 점은 이 대회에 대한 북한의 공식적인 평가와 대회 직후에 나타난 조치들을 신뢰하기 어렵게 만든다. 유일체제의 강화와 천리마운동의 발기를 앞둔 시점에서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은 작가예술가들의 ‘사상의 고삐’를 다시 죄는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회가 끝난 뒤 일 년이 지나기도 전에 현실로 나타났다. 대회석상에서 한설야가 고평했던 시인이나 작가들에 대한 가혹한 비판이 제기된 것이다. 그것은 작가예술가들에 대한 ‘사상의 고삐’가 다시금 죄여졌음을 의미한다.
관련어
제1차 작가예술가대회
,
도식주의
,
제1차 전국작가예술가대회
,
작가예술가대회
참고자료
조선작가동맹, 『제2차 조선 작가대회 문헌집』, 평양: 조선작가동맹출판사, 1956.